[6·25전쟁특집] ‘이름도 명예도 없이’ 산화한 화교 참전용사들

참전용사이지만 '외국인'이라는 이유로 보상 거부 당해

최창근
2022년 06월 25일 오후 4:21 업데이트: 2022년 06월 25일 오후 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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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년 5월 15일, 서울 동작구 국립서울현충원 외국인 묘역에는 ‘특별한 추모식’이 개최된다. 주한국타이베이대표부, 한성화교협회 관계자들이 참석하는 행사의 주인공은 현충원 외국인 묘역에 영면(永眠)한 두 사람의 화교(華僑)이다. 이들의 묘지에는 각각 ‘從軍華僑姜惠霖之墓(종군화교 강혜림지묘)’ ‘從軍華僑魏緖舫之墓(종군화교 위서방지묘)’라고 새겨진 비석이 있다. 두 위(位)의 ‘종군화교’가 국립현충원에 안장된 사연은 무엇일까?

서울 동작구 국립서울현충원 외국인 묘역의 화교 참전용사 위서방과 강혜림의 묘역. | 연합뉴스.

1950년 6.25전쟁이 발발했다. 동족상잔 전쟁은 한민족뿐만 아니라 한반도에 터 잡고 살고 있는 ‘오랜 이방인’ 화교(華僑)에게도 비극이었다. 1945년 해방 직후 한반도에는 약 7만2000명(남한 1만2000명, 북한 6만 명)의 화교가 살고 있었다.

자유민주주의와 공산주의라는 이념의 간극이 불러일으킨 6.25전쟁이 일어나기 전 화교의 모국(母國) 중국도 유사한 일을 겪었다. 1945년 일본 패망 이듬해인 1946년 장제스(蔣介石)의 중국국민당(中國國民黨)과 마오쩌둥(毛澤東)·저우언라이(周恩來)가 이끌던 중국공산당(中國共産黨)은 중일전쟁(1937~45년) 기간 동안 중지했던 내전을 재개했다.

국공내전(國共內戰)에서 중국공산당이 승리했다. 국민당 정부는 1949년 12월, 대만(臺灣) 타이베이(臺北)로 천도했다. 이에 앞서 그해 10월 1일, 마오쩌둥은 베이징(北京) 톈안먼(天安門)에서 ‘중화인민공화국 건국’을 선포했다. 이후 대만해협을 사이에 두고 본토의 중화인민공화국(공산당 정부)과 대만의 중화민국(국민당 정부)이 대치하게 됐다.

6.25전쟁 발발 직후 장제스의 중화민국 정부는 육군 3개 사단 파병을 제안했다. 장제스는 한반도의 전쟁을 ‘반공대륙(反攻大陸·중국 본토 무력 수복)’의 기회로 삼으려 했다. 다만 중공군 개입을 우려한 미국은 장제스의 파병 제안을 반려했다.

중화민국(대만)의 전투부대 공식 파병은 불발됐지만 한반도에 살고 있던 중화민국 국적 화교들은 참전했다. 대표적인 인물이 현충원에 안장된 위서방(1923~1989)과 강혜림(1925~1951)이다.

전쟁 발발 한 해 전인 1949년 4월 20일, 평양에서 조선인(북한인) 520명, 재북한 화교 50명 등 총 570명이 참여해 한중반공애국청년단(韓中反共愛國靑年團)을 결성했다. 초대 단장으로 화교 위서방, 부단장으로 북한인 김명국, 화교 강혜림이 취임했다.

위서방은 1923년 중국 랴오닝(遼寧)성 단둥(丹東)에서 태어났다. 평안북도 신의주에 거주하다 1945년 단둥경찰학교 졸업 후 국·공내전 시기 국부군(國府軍·국민당정부군) 대위로 참전했다. 1949년 국·공내전에서 국민당이 패배하자 신의주로 돌아왔다가 평양 인근 장산탄광 노동자로 일했다. 1925년 중국 산둥(山東)성 치샤(栖霞)현에서 태어난 강혜림은 국·공내전 시기 국부군 부대원으로 공산당의 인민해방군과 전투를 치른 경험이 있었다. 국·공내전 후 평양에 정착해 중화요리점을 운영했다.

1950년 10월 20일, 유엔군이 평양을 점령했다. 위서방은 국군 제1사단장 백선엽 준장을 만나 “한국군 작전에 참여시켜 달라.”고 부탁했다. 참여를 허가받은 위서방은 한중반공애국청년단을 평양화교반공애국보위단(平壤華僑反共愛國保衛團)으로 재편해 정보 수집 업무를 수행했다.

12월 5일, 유엔군이 평양에서 후퇴했다. 위서방과 평양화교반공애국보위단 단원 30명도 함께했다. 위서방은 한국에 도착한 화교단원을 중국수색대로 재편했다. 유엔군과 한국군 측은 이들의 참전에 반대하지는 않았다. ‘외국인’이라는 이유로 계급·군번은 부여받지 못했다.

6.25전쟁에 인민지원군으로 참전한 중공군.

1951년 1월, 국군 제1사단 정보참모 김안일 중령이 대령으로 승진해 제1사단 제15연대장을 맡았다. 중국수색대 소속·명칭도 제1사단 제15연대 중국인특별수색대로 바뀌었다.

2월 2일, 중국인특별수색대는 경기도 과천 관악산전투에 투입됐다. 수색대원들은 중공군으로 위장해 적진에 침투했다. 적 진지 8곳을 격파하는 활약을 펼쳤다. 이에 힘입어 국군은 관악산을 점령할 수 있었다.

부(副)대장 강혜림은 실탄이 다 떨어진 상태에서 백병전을 벌이던 중 중공군의 총탄에 절명했다. 강혜림은 평양 출신으로 유골을 인수할 유가족이 없었다. 유해는 부산화교소학교 교원에 임시 안치됐다. 훗날 한국 정부가 주한국 중화민국대사관과 화교전우들의 요청을 받아들여 1964년 12월 12일 국립묘지(현 국립현충원) 제24묘역으로 이장했다. 그에 앞서 1959년 은성화랑무공훈장이 추서됐다.

1951년 4월, 중국인특별수색대는 녹번리(현 서울 은평구 녹번동)전투에 투입됐다. 인근 야산에 중공군·북한군 혼성 1개 대대 병력이 잔류하고 있었다. 국군 제1사단 제15연대에 섬멸 명령이 떨어졌다. 4월 28일, 중국인특별수색대는 적진 침투 작전에 투입됐다. 주 임무는 적진 요소요소에 포격 표시용 신호기를 게양하는 것이었다.

위서방 대장과 대원들은 5개 분조(分組)로 나눠 적진에 침투했다. 신호기를 게양하고 적군 3명을 생포하는 성과를 올렸다. 곧 정체가 발각돼 총격전이 벌어졌다. 적진 한가운데 고립된 수색대의 피해가 커졌다. 위서방은 중공군 박격포탄 파편에 왼쪽 가슴, 오른쪽 다리 등에 상처를 입었다. 다른 대원 6명도 중경상을 당했다. 이들은 아군에 구출돼 대구 제27육군병원으로 후송됐다. 위서방은 4시간여 수술 끝에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위서방은 이 같은 공로로 금성화랑무공훈장을 받았다.

위서방은 6·25전쟁이 끝난 후 한의사가 돼 강원도 강릉에서 활동했다. 극빈자 무료 진료, 장학사업 등 사회공헌 활동에 힘쓰다 1989년 6월 25일 세상을 떠났다. 그해 12월 한국 정부는 국무회의 의결을 거쳐 1990년 3월 20일 국립서울현충원 제12묘역에 위서방의 유해를 안장했다. 2012년 5월 15일, 현충원 내 강혜림 묘소를 위서방 묘소 옆으로 이장하면서 별도 외국인 묘소로 꾸몄다. 6·25전쟁 때 생사가 엇갈린 전우가 나란히 영면(永眠)에 든 것이다.

1951년 3월, 전시 수도 부산에서 정식 화교부대가 창설됐다. 육군첩보부대(Headquarters of Intelligence Detachment·HID) 산하 정식 중국인부대인 4863부대 SC지대가 그것이다. ‘SC’라는 명칭은 ‘서울 차이니스(Seoul Chinese·한국 화교)’에서 유래했다.

강혜림·위서방이 이끌던 중국인특별수색대가 재한(在韓)화교들이 결성한 ‘자원군’이라면, SC지대는 한국·중화민국(대만) 정부 차원에서 결성한 특수전 부대였다.

1951년 1월, 중국국민당 해외공작회는 현역 장교이던 왕스유(王世有), 류궈화(劉國華)를 한국에 파견했다. 두 사람은 한국 육군정보본부에 화교정보부대 창설을 제안했다. 박경원 육군첩보부대장은 제안을 수락했다.

한국·대만 합작으로 창설된 SC지대에 한국 측은 무기·군복·탄약·차량 등을 지원하고, 대만은 인건비와 공작비를 부담하기로 했다. 초대 대장으로 대만군 현역 장교 뤄야퉁(羅亞通), 부대장으로 한국군 이백건, 정치위원으로 류궈화가 임명됐다.

6.25전쟁 당시 SC지대 대원들.

뤄야퉁은 1949년 황푸군관학교(육군사관학교) 포병과 졸업·임관 후 국·공내전에서 중공군 포로가 됐다. 6·25전쟁 발발 후 중공군 포병 교관으로 참전했던 그는 탈영을 감행해 한국군으로 귀순한 이력의 소유자였다.

SC지대는 서울 종로와 경기도 파주에서 10주 기본 훈련을 받았다. 본부는 서해의 교동도에 뒀다. 초기 대원은 200명, 그중 무장대원 70명은 적 후방에 침투해 첩보 수집, 요인 납치, 적군 시설 파괴 공작 등을 수행했다. 이들은 유창한 중국어·한국어 실력을 무기로 중공군을 만나면 북한 인민군으로 행세하고, 인민군을 만나면 중공군으로 가장했다. 후방 대원 130명은 중공군 포로 심문, 선무(宣撫) 방송, 심리전 임무를 수행했다.

초기 200명 선이던 SC지대원 수는 점차 늘어나 500명에 달했다. 그중 200명은 전선, 300명은 후방에 배치됐다. 진유광(秦裕光·친위광) 전 한성화교협회장은 이렇게 회고했다.

“SC지대원들은 12명 단위로 조를 편성해 전방에 분산 배치됐다. 주 임무는 적 후방에 침투, 첩보를 수집하는 것이었다. 육·해·공 루트를 이용해 침투했다. 황해도 연백·해주, 강원도 철원·김화, 평안남도 성천·순천, 함경남도 함흥 등 적 후방 각지에 침투해 종횡무진 활약했다.”

SC지대의 최후·최대 작전은 1953년 7월 정전협정 직전의 ‘퇴조해상(退潮海上)’ 침투작전이었다. SC지대 공작대 2개 분대(分隊)를 동원해 함경남도 갑산 등 백두산 일대에서 유격·첩보 활동을 계획한 것이다. 화교대원 30명, 한국군 통신기술자 10명 총 40명이 참가했다. 뤄야퉁이 인솔한 부대는 7월 18일, 공작선으로 함경남도 함흥 부근 퇴조 포구에 상륙했다. 목적지는 함경남도 갑산이었다. 7월 23일, 백두산에 이르렀을 무렵 공작대는 북한군에 발각됐다. 중대 규모 적과 교전이 벌어졌지만 중과부적이었다. 대원 대부분이 사살·생포됐다. 생존자는 뤄야퉁 외 오중현(吳中賢(우중셴)·전학림(傳學林·촨쉐린) 등 5명에 불과했다. SC지대의 마지막 작전은 대실패로 끝났다.

1953년 7월 27일, 6.25전쟁 정전(停戰) 협정이 체결됐다. 2개월 후인 9월, SC지대도 해체됐다. SC지대 설립 초기 무장공작대원 70여 명 중 생존자는 20여 명에 불과했다. 나머지는 전사, 행방불명 처리됐다. 대부분 침투 활동 중 사살되거나 체포돼 고문당한 후 처형됐다. 따라서 유해조차 찾을 수 없는 대원이 대부분이었다.

SC지대 해체 후 대원 일부는 중공군 포로 귀순 설득 작업, 대북 중국어 방송 아나운서, 대북 심리전 요원으로 활동했다. 나머지는 생업으로 돌아갔다.

막대한 희생을 치르고도 SC지대 화교부대원들은 참전 유공자로 인정받지 못했다. 1952년 오중현이 충무무공훈장을 수여받은 것이 전부다. 20년이 지난 1971년에야 한국 정부는 SC지대의 참전 사실을 공식 인정하며 53명에게 종군기장을 수여했다. 이후 1975년 보국포장을 수여했다. ‘국가유공자’ 예우는 없었다.

SC지대가 희생해야 했던 것은 인명(人命)이 다가 아니었다. 대만이 파견한 SC지대 책임자 왕스유·류궈화는 부채까지 짊어졌다. SC지대는 모든 공작비용을 자비로 부담해야 했다. 대만 정부가 약속을 어기고 지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대원들이 한푼 두푼 보태기는 했고 류궈화 등이 화교 사회에서 거액을 빌리기도 했다. 2년 반 남짓한 활동 기간 사용한 비용이 당시 화폐로 1억7000만 원에 달했다. 정전 후 부채 상환은 왕스유·류궈화 두 사람 몫으로 남았다. 이들은 20여 년에 걸쳐 빚을 상환해야만 했다.

6.25전쟁에서 인적·물적 희생을 했지만, 화교 출신 참전용사들에게 돌아온 것은 푸대접이었다. 이유는 ‘한국 국적자가 아니다’라는 것이었다. SC지대원들은 국가보훈처 등 관계기관으로부터 생전에 참전용사 대접을 받지 못했다. 사후에도 국립묘지(현충원)에 안장되지 못했다. 한국 정부는 “국립묘지에 안장되려면 국적이 대한민국이어야 하고 국가유공자 자격과 참전용사 요건을 갖춰야 한다”는 원칙론을 앞세워 “죽어서 국립묘지에 묻히고 싶다”는 참전용사들의 요구를 거절했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 강혜림의 묘비 아래 새겨진 ‘義魄長存'(의백장존)이라는 글귀는 씁쓸함을 더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