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바이든 행정부가 극심한 인플레이션을 해소하기 위해 대중(對中) 관세를 부분적으로 인하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하지만 미·중 경제 관계가 이미 심각하게 악화된 상태여서 미국이 중국과의 관계를 전반적으로 재설정하는 흐름은 바뀌지 않을 것이다. 이 흐름이 얼마나 강력한지는 아래 5가지 사례에서 엿볼 수 있다.
◇ 나토 ‘경제 5조’ 구상
9일 아네르스 포그 라스무센(Anders Fogh Rasmussen) 전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사무총장과 이보 달더(Ivo Daalder) 전 나토 주재 미국 대사가 공동으로 ‘권위주의적 강압에 대응하기 위한 경제 5조(Economic Article 5)에 관한 메모’라는 글을 기고했다.
이 기고문의 핵심 요지는 NATO 헌장 5조(집단방위 조항)의 경제 버전인 ‘경제 5조’ 조항을 신설해 민주주의 국가들이 중국·러시아 등 권위주의 정부의 강압적인 경제 조치에 효과적으로 대응하자는 것이다.
즉 “나토 회원국 한 곳에 대한 무력공격은 회원국 전체에 대한 공격으로 간주해 즉각 대응한다”고 규정한 NATO 헌장 5조와 같은 억지력을 경제 부문에서도 확보하자는 것이다.
이들은 기고문에서 “민주주의 세계는 가지고 있는 강력한 경제력을 이용해 권위주의자들을 다루는 방법이 필요하다”며 “불량배들이 우리 중 한 사람의 눈을 찌르면 우리 모두가 반격할 것이라고 말할 때”라고 했다.
이 ‘경제 5조’ 구상은 6월 26부터 28일까지 독일 남부 슐로스 엘마우에서 열리는 주요 7개국(G7) 정상회의와 29일부터 30일까지 스페인 마드리드 열리는 NATO 정상회의 기간에 논의될 예정이다. NATO 정상회의에서는 중국의 군사적 부상을 새로운 위협으로 규정해 대응하는 ‘신(新)전략 개념’도 채택할 예정이다.
만약 NATO를 이끌고 있는 미국이 경제 5조 구상을 주도적으로 추진한다면, 중국 공산당은 이들의 강력한 집단 대응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 美 의회, ‘해외 투자 심사법’ 마련 중
미국 의회는 자국 기업이 중국을 비롯한 적대적 국가의 첨단기술 분야에 투자할 때 정부 허가를 받게 하는 법규를 마련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13일 월스트리트저널(WSJ)에 따르면, 미국 민주당의 밥 케이시 펜실베이니아주(州) 상원의원과 공화당 소속 존 코닌 텍사스주 상원의원이 공동 발의한 이 ‘투자심사법’이 초당적 지지를 받고 있다.
이 법안에 따르면 미국 기업은 중국 등 ‘우려 국가(country of concern)’에 미국 정부가 지정한 특정 기술과 관련한 투자를 하려 할 때 연방정부의 심사를 받아야 한다. 특정 기술은 반도체를 비롯해 배터리, 제약, 희토류, 바이오, 인공지능(AI), 로봇 등이 포함될 전망이다.
중국 당국은 이 법안에 강하게 반발하고 있지만 이 법안은 조만간 미 의회를 통과할 것으로 보인다.
◇ IPEF 출범으로 글로벌 기업 중국 이탈 심화
5월 23일, 바이든 대통령은 취임 후 첫 아시아 순방에서 중국의 역내 경제 질서 주도를 견제하기 위한 미국 주도의 ‘인도·태평양경제프레임워크(IPEF)’를 공식 출범시켰다. IPEF에 참여하는 13개국에는 경제 성장 속도가 매우 빠르고 역동적인 국가들이 포함돼 있고, 이들 국가의 국내총생산(GDP)을 합치면 전 세계 국가 GDP의 40%를 차지한다.
바이든 행정부는 국내 정치 상황을 고려해 기존의 일반적인 무역 협정에서 다루는 관세 인하 등 시장 접근 분야는 IPEF에 포함하지 않았다. 하지만 글로벌 공급망 재편 과정에서 애플 등 다국적 기업이 중국을 떠나려 할 때 IPEF 가입국이 그들의 최우선 선택지가 될 것이다.
현재 글로벌 시가총액 1위 기업 애플은 중국에 막대한 투자를 하면서 중국 스마트폰 업계의 굴기를 이끌었다. 그러나 닛케이아시아의 지난 1일 보도에 따르면 애플이 태블릿PC 아이패드 생산라인 일부를 중국에서 베트남으로 옮기고 있다. WSJ는 애플이 중국 정부의 극단적인 방역정책으로 생산에 심각한 차질이 빚어지자 중국 내 시설 일부를 베트남, 인도로 이전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고 보도한 바 있다.
이와 관련해 지나 러몬도 미 상무장관은 5월 31일 “미국 기업들이 중국을 떠나려 할 때 그들은 IPEF 가입국을 선호할 것”이라고 말했다.
러몬도 장관은 IPEF 가입국은 더욱 투명한 비즈니스 환경과 더 높은 노동 및 환경 기준을 가지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는 또 “지난 1년 반 동안 미국 제조업자들과 수많은 대화를 나눴다”면서 “그들 중 일부는 5년 안에 중국에서 완전히 철수할 계획이고, 일부는 중국에서의 확장을 멈추려 한다”고 밝혔다. 이어서 그는 “중국에 (투자를) 늘릴지에 대해서 미국 제조업자들은 신중하게 고려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실제로 많은 미국 기업들도 IPEF를 반기는 분위기다. 5월 31일 미국 싱크탱크 우드로윌슨센터가 주재한 화상 세미나에서 미국의 전자·자동차·운송·에너지 산업의 대표 4명은 IPEF에 대한 기대감과 함께 공급망 관련 논의에 각별한 관심을 보였다.
사실 최근 베트남은 중국의 주요 경쟁자 중 하나로 떠올랐다. 베트남통신에 따르면 2015년부터 2020년까지 한국과 일본 두 나라의 제조 기업이 베트남에 투자한 금액만 해도 3760억 달러에 이른다. 베트남이 전 세계 첨단기술 기업들이 가장 선호하는 제조업 생산 기지가 됐다고 보는 견해가 많다.
◇ 중국 투자 기피하는 美 벤처투자자
실리콘밸리의 벤처투자자 비노드 코슬라(Vinod Khosla)는 인도계 이민자로, 미국 첨단기술에 투자해 억만장자가 됐다. 그는 6월 14일 블룸버그 TV와의 인터뷰에서 “미국과 중국이 향후 20년간 기술과 경제를 중심으로 대규모 전쟁을 벌일 것”이라고 밝혔다[링크].
코슬라는 “이 분쟁은 각 국가의 가치 체계 ― 하나는 민주주의, 다른 하나는 공산주의 ― 에서 영감을 받아 형성된 기업들 사이에서 벌어지게 될 것”이라고 했다.
그는 기술 투자자들이 어느 나라의 기업들이 성공할지를 결정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고 봤다. 코슬라는 “나는 특히 벤처 캐피탈이 미국 경제를 경쟁력 있게 만드는 데 기여한 것이 자랑스럽다”며 “사실 애국심의 가장 중요한 부분은 미국의 기술을 개발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했다.
그는 중국과 인도를 비교하며 “우리는 인도와 더 많은 협력 기회를 가질 것”이라면서 “이는 투자 가치에 대한 믿음, 중국의 정치 체제와 반대되는 민주주의에 투자하는 가치에 대한 믿음 때문”이라고 했다. 그는 또 “우리는 중국에 투자하지 않을 것이다. 미국 기업이 중국에서 성공하기 어렵기 때문”이라고 했다.
코슬라의 이 같은 입장은 중국 당국에 적지 않은 충격을 줬을 것이다. 중국 공산당은 사실 이미 미국과의 첨단기술 패권 전쟁을 시작했다. 중국 공산당은 자본시장이 없이는 첨단기술 산업이 성장하기 어렵다는 것을 알고 있다. 자료에 따르면 상하이증권거래소에 상장한 커촹반(科創板·과학혁신판) 기업의 80% 이상이 벤처캐피털(VC)과 사모펀드(PE)의 지원을 받고 있다. 그러나 중국 자본시장은 장기투자가 필요하지만 자금이 부족한 상황이어서 해외 VC와 PE가 첨단기술 제조업과 생산자 서비스업에 대규모로 투자하기를 갈구하고 있다. 그래서 코슬라의 발언은 단꿈을 꾸고 있는 중국 공산당 당국에 찬물을 끼얹은 것이다.
◇ 독일 정부, 폭스바겐의 대중국 투자 보증 거부
미국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들도 비슷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여기에서 하나의 사례만 들겠다.
독일 정부가 폭스바겐의 대중국 투자 보증을 처음으로 거부했다.
5월 27일, 로버트 하벡 독일 경제부장관은 “중국 신장 지역의 인권 문제 때문에 중국에 대한 투자 보증 연장을 거부했다”고 밝혔다. 투자 보증은 자국 기업의 개발도상국 투자를 장려하기 위해 기업으로부터 투자 보증 신청을 받아 투자에 따른 리스크를 정부가 분담하는 독일 특유의 정책이다.
독일 폭스바겐은 중국에 40개 생산 거점(중국 합작사인 상하이폭스바겐의 신장 공장 포함)을 보유하고 있고 연간 매출의 40%가 중국에서 발생할 정도로 중국에 대한 의존도가 높다. 폭스바겐은 독일 정부가 투자 보증을 거부함에 따라 중국에 투자한 30억 유로에 대한 위험을 단독으로 져야 한다.
독일 정부가 중국 투자에 대한 지원을 거부한 것은 사실상 자국 기업들이 중국에서 다른 시장으로 이전하도록 유도하는 것이다. 독일 언론 슈피겔은 이를 “독일 대중(對中) 정책의 분수령”이라고 했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이는 국제관계에서 오랫동안 무역을 정치보다 우선시해 온 국가의 변화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했다.
맺음말
미·중은 현재 치열한 ‘전략적 경쟁’을 벌이고 있어 미국으로서는 경제적 이익보다 전략적 이익이 우선이다. 경제적 이익 차원에서 봐도 과거에는 경제가 미·중 관계의 ‘밸러스트 스톤(壓倉石·빈 선박의 균형을 잡기 위해 사용하는 돌)’이었지만 지금은 ‘도화선’으로 변했다. 다시 말하면 미·중 경제 관계는 과거의 상호보완 관계에서 지금의 경쟁 관계로 전환됐다.
그래서 글로벌 보험그룹 처브의 에반 그린버그 최고경영자(CEO) 등 일부 미국 재계 총수들은 여전히 미중 관계를 개선해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미·중 경제 관계는 더는 과거로 돌아갈 수 없는 단계에 이르렀다.
위에서 제시한 5가지 사례는 중국 공산당의 경제 횡포에 대응하기 위한 ‘경제 5조’에서부터 공동의 가치에 기반한 글로벌 공급망 재편(IPEF의 중점 추진), 미국 정부의 해외 투자 심사 체제 구축 등에 이르기까지 미·중 경제 관계의 새로운 시대가 시작됐음을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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