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영과 대권을 넘어…각계 원로들 “제왕적 대통령제 끝내야”

이윤정
2022년 02월 22일 오후 7:35 업데이트: 2022년 02월 22일 오후 7:35
TextSize
Print

역대 최악 선거 우려…갈등 조장·사회 분열 심화
원로들 “선거제도 개혁·헌법 개정 필요”

제20대 대통령 선거가 보름 앞으로 다가온 가운데 사회 각 분야 원로들이 모여 참된 민주주의 실현을 위한 선거제도 개혁과 헌법 개정의 필요성을 짚어 보고 올바른 국정 방향을 제안하는 대화의 자리가 마련됐다.

2월 21일 서울 종로구 대화의집에서 ‘진영과 대권을 넘어’라는 주제로 토론회가 열렸다. 재단법인 ‘여해와 함께’ 부설 기구 중 하나인 대화문화아카데미 주최로 열린 이번 대화모임에는 이홍구 전 국무총리, 김원기 전 국회의장, 최장집 고려대 명예교수, 박명림 연세대 교수, 김선욱 전 이화여대 총장, 김진현 세계평화포럼 이사장, 박은정 전 서울대 교수, 박인제 법무법인 두우 변호사, 유인태 전 국회 사무총장, 이대근 전 경향신문 논설실장, 이부영 자유언론실천재단 이사장, 이상수 전 노동부 장관, 전성철 글로벌스탠다드연구원 회장 등이 참석했다.

재단법인 ‘여해와 함께’는 ‘기독교의 사회 참여, 교회와 사회의 대화, 현재 사회의 인간 소외를 극복하는 인간화’를 표방하며 ‘한국크리스천아카데미’란 이름으로 1965년 5월 7일 정식 출범했다. 이후 2015년 창립 50주년을 맞아 재단 명칭을 ‘여해와 함께’로 변경하고 연구·대화·교육·출판 등의 활동을 하고 있다.

박은정 전 서울대 교수의 사회와 박명림 연세대 대학원 지역학협동과정 교수의 기조 발제로 진행된 토론에 참석한 원로들은 “이번 대통령 선거는 극심한 진영 대결과 적대적 비방이 역대 최악으로 치닫고 있다”며 그 원인으로 ‘제왕적 대통령제’를 지목했다.

참석자들은 “민주주의의 꽃인 선거가 국민 통합과 문제 해결의 과정이 아니라 오히려 갈등을 조장하고 사회 분열을 심화시키고 있다”고 진단하며 “새로운 시대에 대한 기대와 희망을 갖기보다는 오히려 대선 이후의 상황에 대해 깊은 우려와 불안이 국민들 사이에 커지고 있다”고 염려했다.

원로들은 제왕적 대통령제의 문제점과 개헌 방향을 제시하면서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후보, 윤석열 국민의힘 후보, 안철수 국민의당 후보, 심상정 정의당 후보가 오는 2월 25일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주관으로 열리는 정치 분야 TV 토론회에서 세 가지 의제에 대해 논의해줄 것을 강력히 촉구했다.

원로들은 우선 “대통령의 과도한 권력에 대한 견제 장치가 필요하다”는 데 뜻을 같이했다. “1987년 민주화 이후 헌법 개정을 통해 대통령 직선제가 도입됐으나 국회와 정당을 무력화시킬 만큼 강력한 대통령의 권한은 줄어들지 않은 채 거대 정당의 치열한 권력투쟁과 권력 양분의 정치문화가 지금까지 계속됐다”며 “개헌까지 논의는 못 하더라도 현재의 헌법과 법률이 허용하는 범위 내에서 헌법기관 구성에서 대통령의 개입을 축소하고 국무총리와 국무위원의 책임을 강화하며 감사원의 독립을 보장하는 등 현행 대통령제에 대한 견제 장치를 마련하는 일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아울러 “대선이 끝나자마자 정당정치와 의회민주주의를 복원시킬 수 있는 선거제도 개혁에 바로 착수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거대 양당의 후보는 대화와 타협을 통해 갈등을 해소하는 의정 경험이 전혀 없는 데다 선거 과정에서도 정당보다는 선거캠프가 중심이 되는 모습을 보였다”며 이와 같이 정당과 국회가 무력화되고 정치가 실종된 것은 잘못된 선거제도의 문제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진단했다. 소선거구제하에서 선거구당 한 명의 국회의원만을 선출하는 현행제도에서는 선거의 등가성·대표성·비례성 등을 기대하기 어렵고 대통령과 마찬가지로 국회의원도 승자독식 체제로서 지역 구민의 뜻보다는 당론을 따르는 기형적 정치구조를 만들어왔다는 것이다.

덧붙여 “이번 대선이 각 정당을 중심으로 국가경영을 위한 비전과 목표, 정부 운영의 가치와 철학, 문제 해결 역량과 정책을 내놓는 데 집중하기보다 진영 간의 상호 적대와 비방, 후보 개인과 가족들의 추문과 폭로로 진행되는 것은 양당제에 따른 정치 양극화의 문제이기도 하다”고 평했다.

마지막으로 “선거 결과에 깨끗이 승복하고 진영 갈등을 해소하기 위해 연정(聯政)을 추진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이번 대선은 누가 당선되든지 매우 약소한 차이로 당선자가 결정될 수밖에 없으며 다른 후보를 지지했던 지지자들은 실망과 허탈감에 빠질 수밖에 없다”면서 “자칫 선거 결과에 불복하면서 혼란과 갈등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고 내다봤다. 이어 “진영으로 나뉘어 대립하던 국민을 통합하는 방법은 연합·연대·협력의 정신에 기반을 둔 연정뿐”이라며 “다수제 민주주의를 넘어 합의제 민주주의가 필요하다”고 입을 모았다.

토론회 기조 발제자로 나선 박명림 교수는 이번 선거에서 적대와 반목, 혐오·증오의 언사들, 후보 개인과 가족들의 추문과 풍설 등을 둘러싼 자질 공방이 유독 극심해진 원인으로 승자독식의 선거 제도와 제왕적 대통령제를 꼽았다. 박 교수는 “민주화 이후 누적된 진영주의, 대통령에 권력 집중, 인물주의 등의 문제가 합쳐져 지금껏 민주적 검증을 받아본 적이 없고 정치 경험도 전무한 후보들의 낮은 자질과 품성을 둘러싸고 분노와 적대가 드러나고 있는 것”이라며 “선진 민주국가를 만들기 위해 개헌과 선거제도 개혁은 미룰 수 없는 필요조건이 됐다”고 분석했다.

토론자로 나선 이홍구 전 총리도이번 대선 이후 대한민국이 잘될 거라고 생각하는 국민이 많지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1987 6·29 민주화 선언 뒤 대통령 직선제가 도입되고 적잖은 시간이 흘렀는데 한국 민주주의가 큰 진전이 있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고 지적했다. 이어상식적인 얘기지만 대권을 없애고 민권을 다시 민주 절차의 핵심으로 살리는 노력을 해야 한다이번 선거에 너무 기대를 크게 걸기보다는 선거가 끝난 뒤 여야를 막론하고 개혁의 뜻을 합치는 것에 집중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김원기 전 국회의장은 “개혁해야 할 문제가 많지만 한 사람에게 권력이 집중되는 제왕적 대통령제가 모든 문제의 근원”이라며 “정치 개혁의 첫 번째 과제는 제왕적 대통령제를 분권하고 국회가 정치의 중심이 돼야 한다”고 말했다. 이를 위해 “국민의 공감대를 얻고 개헌을 성사시키는 것이 현재 정치가 안고 있는 문제를 해결하는 길”이라고 역설했다.

최장집 고려대 정치외교학과 명예교수는 “투표자의 40% 미만을 득표해도 대통령이 될 수 있고 상대 후보보다 한 표라도 더 얻으면 전체를 독식하는 게 한국의 민주주의”라고 단언했다. 그러면서 “다수결로 승자 독식하는 대통령을 선출하는 선거 방식이 구조적, 제도적으로 비호감 선거를 만드는 것”이라며 “대통령을 선택하지 않은 더 많은 국민이 있지만, 대선에서 이기기만 하면 이들은 배제해도 된다고 생각하는 다수결 민주주의에 대한 과도한 믿음을 거둬야 한다”고 했다.

최 교수는 특히 정당 제도에 주목했다. “대통령 중심제와 짝을 이루는 정당정치의 변질도 큰 문제라며한국의 정당은 전형적인 카르텔 정당이라고 일갈했다. 카르텔 정당은 정당이 오히려 국가에 종속되고 국가의 행정부 기능을 수행, 집행하는 기능으로 변질된 개념이라는 게 그의 설명이다. 이어선거 때마다 정당은 왜소화되고 캠프가 정당을 대체하는 구조가 지지난번 대선때부터 점점 강해졌고 이번에도 이어지고 있다. 사실상 캠프가 정부를 구성한다정당은 있으나 국가에 의존하는, 이러한 정당 체제도 정상화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전성철 글로벌스탠다드연구원 회장 역시 “정당 대표가 당론을 정하면 국회의원들이 다 따라야 하는 정당 제도를 고쳐야 한다”고 말했다.

원로들은 대선 과정과 대선 이후까지 국민통합과 정치 발전을 위한 의견을 계속 모아가자는 데 합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