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공산당(중공)은 대만 무력 침공을 계속 외쳐왔으며, 외국에서도 중공의 침공 발생 가능 시점을 계속 추측해 왔다.
최근,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할 가능성이 고조된 가운데 중공이 혼란을 틈타 대만해협에서 전쟁을 일으킬 수 있다는 관측도 제기된다.
중공은 대만 침공 준비에 박차를 가해왔지만, 실제로 전쟁을 일으킨다면 준비하는 데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릴까?
동부전구 육군, 대만 침공에 불리한 상황
중공 인민해방군 육군은 총 13개의 집단군으로 구성돼 있으며, 동부전구는 71, 72, 73 집단군 등 3개의 집단군이 편성돼 있다. 또한, 중공의 해병대는 총 6개의 해병대 여단으로 구성돼 있으며, 동부전구에 2개 여단이 편성돼 있다.
제72, 73 집단군은 각각 2개의 양서(수륙)합성여단을 보유하고 있다. 제72 집단군은 저장(浙江)성에 주둔하고 있고, 제73 집단군은 푸젠(福建)성에 주둔하고 있다. 동부전구의 병력 가운데 두 집단군의 양서합성여단과, 해병대는 중공의 첫 상륙부대가 될 것이다.
동부전구에서 실질적으로 1차 상륙작전에 참여할 수 있는 부대는 아마 6개 여단 총 3만여 명일 것이다. 기타 부대는 강습상륙 전차를 보유하고 있지 않아 1차 상륙부대가 해안과 항구를 점령한 후 중장비와 함께 상륙하든지 아니면 중장비를 포기하고 민간선박을 이용해 경무기만 장착해 상륙할 것이다.
동부전구는 장쑤(江蘇)성에 주둔하고 있는 제71 집단군도 있지만, 중형합성여단 위주여서 1차 상륙 임무를 담당하기 어려울 것이며, 만약 중장비를 포기한다면, 지상전 우세도 잃게 될 것이다.
반면 대만의 상비군은 약 18만8천 명이다. 동부전구가 3개 집단군을 모두 투입하더라도 규모가 비슷해 숫적 우위를 차지하기 어렵다. 이는 상륙작전 성공의 성패와 직결된다.
그렇다고 제71, 72 집단군이 모두 푸젠으로 집결하면 동중국해 연안의 저장, 상하이(上海), 장쑤는 방어 전력에 공백이 생기게 된다. 이는 동중국해에서 군사적 마찰을 빚고 있는 중공으로서는 금기시되는 전략이다.
따라서 중공은 다른 전구에서 지상부대를 이동시킬 가능성이 크다. 만약 제71, 72 집단군을 움직인다면 마찬가지로 다른 병력을 이동해 공백을 메워야 한다. 대만전이 생각보다 장기전이 될 가능성도 대비해야 한다.
동부전구 해군·공군, 우세 장담 어려워
현재 동부전구 공군은 러시아산 수호이(Su)-30 전투기 여단 1개 30~40대, 젠(J)-16 전투기 여단 2개 60~70대, J-11B 전투기 여단 2개 60~70대, J-10 전투기 여단 2개 약 70대를 보유하고 있다.
만약 이 전투기들이 모두 푸젠 공항에 배치된다면, 동중공해 연안의 방공은 매우 취약해진다. 특히 4세대인 J-20 전투기대대가 이동한다면, 미군과 연합군 전투기가 동중공해 제공권을 완전히 장악하게 된다.
이러한 위험성을 감수하고 동부전구 공군의 4세대 전투기를 모두 대만해협 공격에 투입하더라도 제공권 장악을 장담하기 힘들다. 대만 공군 역시 미국 F-16 전투기 113대, 자국산 경국호(經國號·IDF) 전투기 103대, 프랑스 미라주 2000 전투기 46대를 보유하고 있어 저항이 만만치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동부전구 해군, 즉 동해함대는 중공 3대 함대 중 전력이 가장 약하다. 동해함대는 대형 군함이 부족하며, 중공 중대형 군함의 절반만 보유하고 있다. 따라서 중공 해군은 대만을 침공하려면 남해함대에서 더 많은 상륙함을 끌어와야 하며 대형 군함도 북해함대와 남해함대에서 이동시켜 증원해야 한다.
이러한 대규모 지상부대의 이동과 공군, 해군 배치는 1~2주만으로는 완료하기 어려운 대규모 작업이다. 최소 한 달 이상의 시간이 소요될 수 있다. 그러나 중공군은 실제로 이런 대규모 군사 이동을 실행해본 적이 없으며 모의 훈련도 해본 적이 없다.
이러한 상황에서 인도나 신장 국경 지역에서 돌발 상황이 발생하거나, 정치 지형에 변동이 생길 경우 계획 실행이 지연되거나 어려워질 수 있다.
중국 내부 지상부대 이동의 제약
만약 중공이 다른 전구에서 지상부대를 이동시킨다면, 가장 먼저 이동시킬 부대는 남부전구의 제74 집단군일 것이다. 제74 집단군은 광저우 후이저우(惠州)에 주둔하고 있고 푸젠에서 가장 가까우며, 2개의 양서합성여단을 보유하고 있어 원래 대만해협 전쟁에 대비했을 것으로 보인다.
남부전구는 2개의 집단군으로 구성돼 있으며, 5대 전구 중 전력이 가장 약한 전구이다. 제74 집단군이 동부전구로 이동한다면, 남부전구는 제75 집단군만 남게 될 것이다.
제75 집단군은 양서합성여단을 보유하고 있지 않고 남부전구의 전력 공백으로 인해 대만해협 전선으로 이동할 가능성은 작다.
제75 집단군은 윈난 쿤밍(昆明)에 주둔하고 있고 내륙방어에 치중하고 있으며, 베트남, 라오스, 미얀마 방어를 담당하고 있어 쉽게 이동하지는 못할 것이지만, 어쩔 수 없이 광시, 광둥으로 부분 이동해 제74 집단군의 공백을 메울 수도 있다.
하지만 육상 국경에서 상황이 벌어지거나 미군이 남중공해서 제2전선을 벌이거나 심지어 하이난섬을 상륙하는 등 남부전구에서 상황이 벌어진다면, 남부전구는 즉각 수동적으로 변할 것이다.
중부전구의 제83 집단군은 중공의 유일한 예비대이며, 허난 신샹(新鄉)에 주둔하고 있다. 또한, 제83 집단군은 두 번째로 대만해협으로 직접 이동시킬 수 있는 집단군이지만, 양서합성여단을 보유하고 있지는 않다.
중부전구 육군은 제80, 81, 82의 3개 집단군을 보유하고 있으며, 제81 집단군은 올림픽 선수촌이 있는 허베이성 장자커우(張家口)에 주둔하고 있고 베이징 북서측에 위치해 있다.
제82 집단군은 허베이 바오딩(保定)에 주둔하고 있다. 이 두 집단군은 베이징을 수호하는 핵심 부대로, 이동될 가능성은 작다. 중공 수뇌부가 스스로 베이징을 떠나 산시(陝西) 등 내륙 지역으로 이동할 수 있지만, 이 두 집단군은 대만해협이 아닌 내륙으로 이동할 것이다.
북부전구의 제80 집단군은 산둥 웨이팡(濰坊)에 주둔하고 있으며, 산둥반도의 방어를 포기할 가능성이 크지 않다. 하지만 동부전구의 공백으로 장쑤, 저장, 상하이와 동중공해, 황하이 연안의 방어는 매우 취약해질 수도 있어 제80 집단군은 어쩔 수 없이 남부로 이동할 수도 있다.
북부전구는 또 다른 2개의 집단군을 보유하고 있다. 제78 집단군은 랴오둥반도에 주둔하고 있으며, 한반도 방어를 담당한다. 제79 집단군은 헤이룽장(黑龍江)에 주둔하고 있으며, 러시아 방어를 담당하고 있다. 이 두 집단군이 대만해협으로 이동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
서부전구의 두 집단군 중 이동할 가능성이 가장 큰 집단군은 제77 집단군이지만, 경로가 길다.
중공이 실질적으로 이동할 수 있는 집단군은 남부, 중부, 서부의 각 1개 집단군 총 3개의 집단군이다. 거기에 동부전구의 3개 집단군을 합하면 총 6개의 집단군은 푸젠 연안에 집결할 수 있다. 하지만 남중공해, 동중공해의 방어는 공백이 생길 것이며, 서부전구의 병력도 취약해져 중공-인도 충돌에 대응할 수 없을 것이다.
중공이 6개 집단군의 병력을 집결하면, 대만 수비군과 대략 2:1의 비율을 보인다. 이는 공격하는 쪽에서 매우 유리한 규모는 아니다.
1945년 오키나와 전투에서, 미군은 해상·공중 우세를 점했으며 19만 병력을 집결했지만, 일본의 10만 수비군을 간신히 물리쳤다.
오키나와의 면적은 대만의 1/30에 불과하고 일본군은 당시 해안가 방어를 스스로 포기했으며, 섬 고지를 이용해 미군과 교전했다. 미군은 80일 만에야 오키나와를 대부분 점령했다.
즉 중공 육군은 총 13개의 집단군 중 대만해협에 6개의 집단군을 투입해야만 우세를 점할 수 있지만 압도적이라고는 보기 어렵다. 만약 그 이상의 병력을 투입한다면, 다른 전구에는 방어 공백이 생겨 위험성이 크다.
6개의 집단군을 집결하는 데 얼마나 걸릴까
동부전구의 제71 집단군은 장쑤에서 푸젠으로, 중부전구의 제83 집단군은 신샹에서 푸젠으로, 서부전구의 제77 집단군은 쓰촨에서 푸젠으로 이동해야 하며, 이동 거리는 짧지 않다.
동부전구의 제72 집단군은 저장에서 출발하고 남부전구의 제74 집단군은 후이저우에서 출발해 보기에는 멀지 않아 보이지만, 실제로 시간이 꽤 걸린다. 전체 병력이 경장비만 장착해도 몇 주가 걸릴 것이며, 장비까지 운송한다면 더 많은 시간이 소요될 것이다.
한국전쟁 당시, 중공은 한국전쟁에 297만여 명을 투입했지만, 한 번에 투입한 것은 아니다. 중공과 미국 양쪽 군대가 처음으로 접촉했을 때 중공 제9병단은 약 10만 명으로 미군 해병대 1사단을 포위했다. 하지만 중공은 10배의 사상자를 냈으며, 미군이 철수하도록 허용했다.
이 전투가 바로 중공이 대대적으로 선전하는 장진호 전투이다.
그러나 중공군 장성들은 더 많은 부대를 집결하지 못해 아쉬워했을 것이다. 중공군은 장진호 전투의 성과를 떠벌렸지만 실제로는 이 전투의 사상자 규모가 커서 전쟁 후반기에는 대규모 공격을 조직할 수 없었다.
중공은 중장비가 부족해 병력을 대거 집결시킬 수 없었고, 방한복을 보급하지 못해 대량의 병력이 동사하는 참극을 일으켰다.
중공의 또 다른 대규모 전투 경험 사례는 중공-베트남전이다.
중공-베트남전 병력 이동에만 한 달 걸려
1978년 12월 7일, 중공 군사위원회는 베트남과의 전쟁을 결정했고 다음 날 1979년 1월 10일까지 모든 전투 준비를 완료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같은 달 31일, 중공 군사위원회는 베트남전쟁의 규모를 확대하기로 결정했다. 광저우군구와 쿤밍군구는 계획을 다시 조정했으며, 이듬해 2월 15일까지 작전 준비를 완료했다. 즉 실제 준비 기간은 한 달 반이다.
당시 주로 인근에 위치한 광저우군구와 쿤밍군구의 총 9개의 군단, 29개의 보병사단, 2개의 포병사단, 3개의 대공포병사단, 철도병, 공병, 통신병 등 각종 병과 부대 총 22만 명이 동원됐다.
또한, 당시 중공은 쿠데타를 방지하기 위해 우한군구 사령관 양더즈(楊得志)와 쿤밍군구 사령관 왕비청(王必成)을 맞바꿨다. 하지만 2월 25일, 양더즈는 갑자기 병에 걸려 비밀리 베이징으로 돌아가 치료를 받았으며, 장즈슈(張銍秀) 쿤밍군구 부사령관이 사령관 대리로 임명됐다. 중공군은 윈난과 광시 양쪽에서 공격했으며, 쿤밍군구와 광저우군구는 각각 따로 군사위원회에 보고했고 통일된 전선 사령관이 없었다.
중공 공군도 700여 대의 항공기를 동원했지만, 중공-베트남 국경 경비만 담당했을 뿐 베트남에 진입해 참전하지는 않았다.
중공 해군 남해함대는 217함선편대를 편성해 120여 척의 함선, 170여 대의 해군 항공기를 집결했으며, 소련의 시사군도 침공과 중공의 해저 보링용 플랫폼 파괴에 대비했다. 중공군은 연안과 내륙 공항에 대공포와 지대지미사일을 배치해 연안 항구, 공항 등 중요 시설의 공습을 방어했다.
이 전쟁은 40년 전의 상황이고 그동안 중공군은 꾸준히 병력을 현대화해왔다. 그러나 대만해협 전쟁의 준비 규모는 중공-베트남전보다 최소 몇 배는 될 것이며, 다른 전구에서 지상부대를 이동시키는 거리도 훨씬 멀다.
중공군 집단군 1개 병력은 6만5천 명이며, 현재 중공의 고속철 수송 가능 인력은 1천 명, 일반 열차는 2천 명이다.
따라서 집단군 1개 병력을 이동시키려면 고속철 600여 편, 일반 열차 300편이 필요하다. 하루 운행 편수가 고속철 20편, 일반 열차 10편이라면 병력 운송에만 한 달이 걸린다는 계산이 나온다.
쓰촨, 허난, 장쑤 등 지역에서 대규모로 병력을 이동시키려면 중공의 대부분 철도망은 군대에 의해 관리될 것이며, 관련 여객 수송은 중단될 것이다.
이는 인원 수송만 계산한 것이며, 군사장비 수송은 별도로 따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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