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수 한국인에게 여전히 낯선 이름 정율성. 그는 일제 강점기 광주에서 태어나 중국 땅에서 젊은 시절을 보낸 후 해방 후 잠시 ‘북한인’이 됐다, ‘중국인’으로서 삶을 마감한 ‘한인(韓人)’ 음악가이다.
오늘날 중화인민공화국 제2 국가(國歌) 격인 ‘중국인민해방군행진곡’을 작곡하여 녜얼(聶耳)·센싱하이(冼星海)와 더불어 중국 현대 음악계 3대 악성(樂聖), 중국 군가의 아버지로도 꼽힌다. 생애 동안 360여 곡을 남긴 그의 노래를 14억 중국인 중 10억 이상이 알고 있다.
정율성의 삶을 두고서는 항일(抗日) 독립운동가라는 평가와 북한·중국을 위해 헌신한 공산주의자라는 평가가 엇갈린다. ‘에포크타임스’는 5회에 걸쳐 정율성의 행적과 논란을 다룬다.
저우언라이의 요청과 김일성의 화답으로 성사된 정율성-딩쉐쑹 부부의 중국 귀환 직전, 1950년 북한의 전면 남침으로 6·25전쟁이 발발했다. 전쟁 발발 후 딩쉐쑹은 인민군이 점령한 서울을 방문하기도 했다. 9월, 정율성은 어머니 최영온과 함께 압록강을 건너 중국으로 돌아갔다. 중국 행에는 차이청원(柴成文) 중국대사관 정무참사관이 도움을 줬다.
1950년 10월, 펑더화이(彭德懷)가 지휘하는 중국 인민해방군이 압록강을 건너 참전했다. 중국 공산당은 이들을 ‘중국인민지원군(中國人民志願軍)’이라 칭했지만, 실체는 정규 중국 인민해방군이었다. ‘항미원조(抗美援朝·미국에 대항해 북한을 돕는다)’를 명분으로 참전한 인민지원군을 따라 12월, 정율성도 다시 북한 땅에 발을 디뎠다.
‘항일전사 정율성 평전: 음악이 나의 무기다’에는 당시를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정율성은 중국 인민지원군을 지원하는 임무를 띠고 전선에 투입된다. 비록 총을 들고 싸우는 군인은 아니었지만 인민지원군을 따라 서울까지 내려온 그는 포화가 빗발치는 최전선을 피하지 않는다. 책상에서 음악을 하는 것이 아니라 현장에서 음악을 작곡하는 것이 정율성의 체질이었기 때문이다.”
즉 정율성은 북한의 불법 남침으로 시작된, 동족상잔(同族相殘)의 현장에서 예술혼을 불태운 것이다. 송서평 중국 시난(西南)과기대학·예술학원 교수의 2009년 논문 ‘정율성의 음악창작 탐구’에서는 6·25전쟁 당시 정율성의 음악 활동을 “조선(한국)전쟁은 정율성의 창작 격정(激情)을 불러일으켰다. 정율성은 중공군으로 참전하는 4개월 동안 북한군과 중공군의 사기(士氣) 고취를 위해 ‘조선인민유격대전가’ ‘중국인민지원군행진곡’ ‘공화국 기치 휘날린다’ ‘우리는 탱크부대’ ‘전사의 맹세’ ‘지원군 10찬(讚)’ 등을 작곡했다”고 기록했다.
1953년 7월 정전협정 체결로 3년간의 6·25전쟁 포성이 멎었다. 정율성도 중국으로 돌아왔고, 중화인민공화국 국적을 취득하고 중국 공산당 당적도 회복했다.
해방 후 북한행, 북한 인민군행진곡 작곡, 6·25전쟁 시 창작열 불태워
중국으로 돌아 온 정율성은 베이징인민예술극원(北京人民藝術劇園)에 배속됐다. 그 시절중국 전역을 돌며 각 지방 민요를 채록했다. 1953년 아내 딩쉐쑹과 헤이룽장성 하얼빈(哈爾濱) 농공업생산 현장에서 일하면서 ‘싱안령에는 눈꽃 내리네(興安嶺上雪花飄)’를 작곡했다. 1957년부터 1961년까지 윈난(雲南)성을 네 차례 방문하여 소수민족 바이족(白族) 설화를 바탕으로 가극 ‘망부운(望夫雲)’을 창작했다. 구이저우(貴州), 쓰촨(四川), 네이멍구(內蒙古) 등지의 소수민족 지역을 직접 방문해 그들의 생활을 반영한 작품들을 작곡했다. 훗날 중국 음악교과서에도 수록되는 ‘우리는 행복해요’ 등의 동요도 창작했다.
우리는 행복해요
우리의 생활은 얼마나 행복한지요/우리의 공부가 얼마나 즐거운지요
새벽바람이 오성홍기에 불고/ 노을이 많은 산과 강에 붉게 물드니
도시 시골을 가리지 않고/ 집집마다 아이들이 모두 학교에 가요
하하하하하! 하하하하하!/ 우리의 생활은 얼마나 행복한지요
하하하하하! 하하하하하!/ 우리의 공부가 얼마나 즐거운지요
1958년 마오쩌둥의 지시로 이른바 대약진운동(大躍進運動)이 전개됐다. 농업·공업 생산량 증대, 집단 농장·공장화에 초점이 맞춰진 운동이었다. 중국 공산당은 예술가들도 직접 생산 현장으로 갈 것을 명령했다. 정율성도 농촌 인민공사로 배속돼 토법고로(土法高爐·대약진 운동 당시 중국인들이 사용한 수제 용광로)를 이용한 이른바 ‘전민연강(全民煉鋼·모든 사람이 강철을 제련함)운동’에 참가했다. 결과적으로 1958~62년 대약진운동은 2,500만명 이상 아사자를 내고 대실패로 종결됐다.
정율성은 대약진운동에 대하여 공개적으로 자신의 의견을 발표했다. 그는 공·사석에서 “마오쩌둥 주석의 농촌 지도 방식은 열정은 있지만 과학성은 부족하다”는 발언을 곧잘 했다. 이를 빌미로 1957~59년 진행된 반우파 운동(反右派運動) 기간 동안 ‘우경(右傾)’ ‘반당(反黨)’으로 몰려 비판받았다. 중국 공산당 중앙은 정율성에게 탈당을 요구하기도 했다. 1962년 중국 공산당 중앙은 “평범한 반대의견을 냈다”는 결론을 내리고 공개 사과를 요구하는 것으로 마무리 지었다.
대약진운동·반우파운동이 끝난 후 다시 한번 광풍이 몰아쳤다. 1966년 시작된 문화대혁명(文化大革命)이다. 중국 공산당 간부와 더불어 지식인·예술가들이 집중 타깃이 됐다. 지난날 우파·반당 혐의를 받았던 정율성도 집중훈련반에 배속돼 ‘학습’을 강요받았다. 명목상 학습일 뿐 공개 자아비판, 노동 개조, 홍위병의 조리돌림 등이 이어졌다. 홍위병들은 정율성의 집에 난입해 집기를 부수고 악보·원고를 강탈하기도 했다.
정율성은 문화대혁명 시기 홍위병의 행태를 보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 “문화대혁명이 아니라 문화대학대이다. 전쟁도 끝났는데 왜 저(홍위병)들은 스스로 전쟁터 속으로 들어가려 할까.”
문화대혁명 기간 동안 정율성의 창작 활동은 제약받았다. 중국 공산당 영수(領袖) 마오쩌둥 관련 작품 만은 예외였다.
정율성이 옌안에 머물던 1942년 5월, 문화예술인 50여명이 참석한 좌담회가 개최됐다. 이른바 옌안 정풍운동(整風運動) 일환으로 이뤄진 좌담회의 정율성은 유일한 조선인 참석자였다.
마오쩌둥은 개회식·폐회식에 연설했다. 훗날 ‘옌안문예좌담회강화(延安文藝座談會講話)’로 불렸다. 오늘날까지 현대 중국 혁명 문예의 지침으로 간주되고 있다. 마오쩌둥은 “문예는 정치에 복종한다”는 기본 원칙을 바탕으로 “노동자, 농민, 병사를 위해서 복무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모순과 투쟁을 전형화하여 문학작품이나 예술작품을 만들어냄으로써 인민대중을 각성하게 하고 감동·분발하게 하며 인민대중이 단결과 투쟁을 향해 나아가도록 추동하고 자신의 환경 개조를 실행하게 할 수 있다”고도 했다. 문화군대(文化軍隊)론이다.
반우파운동·문화대혁명시 우경분자로 박해, 마오쩌둥 찬가 작곡
마오쩌둥의 문예강화가 정율성에 끼친 영향에 대하여 송한용 전남대 사학과 교수는 ‘정율성의 사상형성과 지향: 1945년 이전 중국에서의 활동을 중심으로’ 글에서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정율성은 철저히 마오쩌둥의 ‘문예강화’ 정신을 추구하면서 성장한 ‘혁명 현실주의 예술가’였다. 동료들이 기억하는 정율성은 혁명 전사적 예술가이고 오직 인민대중이 필요로 하는 혁명 예술을 창작하였으며, 항상 농·공·병 즉 인민 대중과 결합되는 사상과 관점을 중시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음악은 단순한 오락을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혁명의 무기이며 전투의 무기라고 하면서, 혁명적 노래는 반드시 새로운 세대의 투지를 불러일으키고 혁명적 정신을 양성하게 될 것이라고 하였다.”
1958년 이러한 정율성은 마오쩌둥의 시 ‘접연화(蝶戀花): 리슈이(李淑一)에게 답함’에 곡을 붙인 적이 있었다. 이애련 숙명여대 작곡과 겸임교수는 2019년 광주문화재단이 펴낸 ‘정율성 음악세계와 현대성의 지평’에 수록된 논문 ‘정율성 음악연구: 음악창작을 중심으로’에서 문화대혁명 시기 정율성의 작품 활동을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문화대혁명 시기 정율성은 창작 권리를 박탈당하게 되어 창작을 할 수 없게 되었고, 그뿐만 아니라 ‘반당 분자’,‘ 간첩’으로 몰려 갖은 압박으로 힘든 나날을 보냈다. 정율성은 이에 굴하지 않고 1958년부터 창작하는 것을 시작하였던 마오쩌둥 시사 가곡 창작에 매진하였다. 작곡, 공연 등 모든 예술 활동이 금지된 문화혁명 기간마저도 정율성의 불타는 창작열을 끝내 꺾지는 못했다. 그는 이 기간 그 자체가 웅장하고 아름다우며 기백이 넘쳐흐르는 교향악으로 중국 혁명사의 최고탑이라고 불리는 마오쩌둥 시사 20편에 곡을 붙이는 창작작업을 하였으며, ‘마오쩌둥시사(毛澤東詩詞)’ 가곡 창작은 1971년 완성된다. 문화대혁명 시기 작곡가들은 ‘집단 창작’만이 가능했고 고작 중국의 표준극, 견본극, 양판희(樣板戱)만을 배울 수 있었다. 개인적으로 자유롭게 창작하는 것이 금지되었고, 작곡가들은 정부의 요구에 따라 작품을 창작하는 정도 밖에는 활동할 수가 없었다. 문화대혁명 시기에는 가사를 얻을 수가 없어서 창작을 할 수 있는 방법으로 정율성이 선택한 것은 ‘마오쩌둥시사’였다. 이를 통해서만 창작을 계속 이어갈 수가 있었다.”
결과적으로 젊은 시절 ‘공산당 찬가’를 창작한 정율성은 만년을 ‘마오쩌둥 찬가’ 작곡으로 보낸 셈이다. 저명 음악가로 국무원 문화부장을 역임하는 저우웨이즈(周巍峙)는 “마오쩌둥의 시에 곡을 붙이는데 정율성을 능가할 사람이 없다”라고 평하기도 했다.
1976년 저우언라이·마오쩌둥이 차례로 세상을 떠났다. 문화대혁명은 종식됐다. 장칭(江青), 왕훙원(王洪文), 장춘차오(張春橋), 야오원위안(姚文元) 등 문화대혁명 4인방은 실각했다. 낚시로 소일하던 정율성은 12월 17일, 베이징 교외의 낚시터를 찾았다. 영하의 날씨 속에서 낚시를 하던 정율성은 가슴 통증을 호소하며 쓰러졌고, 그날 세상을 달리했다.
사후 정율성은 베이징 바바오산혁명열사묘(八寶山革命公墓)에 안장됐다. 12월 17일 치러진 추도식에는 혁명 원로들이 참석했다. 훗날 중국 공산당 총서기가 되는 후야오방(胡耀邦) 중국과학원 부원장이 추도사를 낭독했다. “정율성 동지는 훌륭한 분이었다. 동지는 린뱌오와 4인방에 대해서도 단호하게 투쟁했다. 특히 옌안 시절, 그의 음악은 중국의 최고봉에 올랐고, 중국 인민의 해방과 혁명을 위해 커다란 기여를 했다.”
1977년 12월 7일, 베이징에서 정율성 1주기 추모 음악회가 개최됐다.
사후 중국 혁명열사묘에 안장, 중국인 부인은 외교무대에서 활약
정율성이 세상을 떠난 후, 아내 딩쉐쑹은 외교 무대에서 활약했다. 1971년 중국인민대외우호협회(中國人民對外友好協會) 비서장이 된 것을 시작으로 중국대표단으로서 외국 순방을 했다. 1979년 중국 여성 최초로 주네덜란드 특명전권대사가 됐고, 1982년 주덴마크 대사로 전임돼 2개국 주재 공관장이 됐다. 이후 1994년 은퇴할 때까지 중국 대표로서 세계 각국을 누볐다. 그러다 2011년 세상을 떠났다.
1943년 생인 딸 정샤오티는 베이징 중앙음악학원(中央音樂學院) 작곡과 졸업 후 중국 인민해방군 총정가무단창작실(中國人民解放軍總政歌舞團創作室)에 적을 두고 활동했다. 1994년부터는 바로크합창단 단장을 맡았다. 이후 중국음악가협회·한중우호협회 이사로 활동하고 있다.
2016년 출간된 ‘중국의 별이 된 조선의 독립군: 정율성’ 출간사에서 정샤오티는 “나의 아버지 정율성은 일본 침략자에 단호하게 맞선 독립투사였다. 그분은 처음부터 끝까지 조선민족의 독립을 염원하며 1930~40년대 중국에서 항일투쟁에 헌신했다. 동시에 그는 중국인들로부터 존경받는 음악가이고 중국 국민들이 즐겨 부르는 ‘옌안송’과 ‘중국인민해방군가’를 작곡했다. 그의 특이한 경력은 한중 양국의 우호관계를 이어지는 다리였다”고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