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석우 “수교 당시 시한에 쫓겨 한국 국익 최대한 확보 미흡”
최창근 “대만과 단교하며 일방적 통보·명동 대사관 처리…앙금 남겨”
조성환 “미중 충돌서 경제·정치 분리 안 돼…안미경중은 기회주의”
한중수교 29주년을 맞아 양국 간 수교 및 관계발전 과정을 회고하고 한중관계를 전망하는 자리가 마련됐다.
8일 서울 중구 정동1928 아트센터에서 ‘한중수교 29주년 회고와 전망’이라는 주제로 세미나가 열렸다.
지난 7월 1일 창립된 에포크미디어코리아 중국전략연구소 주최로 열린 이 날 세미나에는 구상진 헌법을 생각하는 변호사 모임 회장, 한민호 공자학원 실체알리기운동본부 대표, 한영복 자유민주통일교육연합 사무총장, 이순임 전 MBC 공정노조 위원장 등 사회 주요 인사들이 참석했다.
그랜트 리 중국전략연구소 이사장은 인사말을 통해 “한중수교를 통해 중국에 있는 조선족 교포와 한국 민족이 어울릴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됐다”며 “중국이 ‘하나의 중국’을 강요하면서 중국과 외교 관계를 맺는 과정에서 대만과 단교하고 대사관도 넘기고 쫓겨나다시피 한 아픔도 있었고 엇갈린 민족의 운명이 동시에 시작됐다”고 말했다.
이어 “수교 후 29년이 흐르면서 많은 변화가 있었고 한중간 미래지향적으로 나가야 할 과제가 많이 남아있다”며 “지난 7월 창립한 중국전략연구소가 더욱 성장하도록 많은 성원과 지지를 부탁한다”고 당부했다.
이날 1992년 한중수교 당시 외교부 아주국장을 지낸 김석우 북한인권시민연합 이사장이 기조 발언에 나서 주목을 받았다. 김 이사장은 대통령비서실 의전수석비서관, 통일원(현 통일부) 차관, 국회의장 비서실장 등을 역임했다.
김 이사장은 “1992년 8월 24일, 한중수교는 큰 틀에서 성공적인 외교였다”고 운을 뗐다.
그는 한중수교에 대해 “전 지구적 냉전체제의 해체 과정에서 대한민국이 확장된 국력을 능동적으로 대외에 투사해 한반도의 분단 고착상태를 깨는 ‘북방외교’ 2를 매듭지은 것”이라며 이같이 평가했다.
그러면서 “동북아지역 판도의 관점에 보면, 분단된 한국이 과거 미국과 일본이라는 대리자를 통하던 구조를 변화시켜 중국, 소련과 직접 대화할 수 있는 지위를 확보했다”며 “일본의 역할이 급속하게 약해져 역내 주도권이 중국으로 넘어가는 전환점이 됐다”고 분석했다.
이어 “29년이 지난 시점에서 비판적으로 본다면, 한국이 국제적 흐름을 선제적으로 활용해 수교 성과를 거두었음에도 시간에 쫓기는 ‘강박 의식’이나 ‘장기전략 미비’, 그리고 선(善) 의지를 고수하는 외교로 국익의 최대한 확보가 미흡했다는 반성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특히 “시진핑 체제 성립 이후 강성 팽창된 국력을 바탕으로 과거의 중화 복속주의로 회귀해 한국을 포함한 주변국을 무리하게 압박하는 전랑외교(戰狼外交·늑대전사 외교)의 추구가 그러한 비판을 뒷받침한다”고 부연했다.
김 이사장은 “노태우 정부 시기에 외교목표 X, Y, Z를 설정하고 이를 완결시키기 위해 스스로 시한에 쫓기는 구도를 만들었다”고 분석했다.
1992년 임기 말 노태우 정부는 2가지를 지시하며 외무부를 압박한 것으로 알려졌다. 자신의 임기 만료 전에 한중수교를 하라는 것과 한국 대통령으로는 처음으로 중국을 국빈방문하고 싶다는 것이었다. 퇴임을 앞둔 대통령의 지시로 압박을 받으면서 시간에 쫓기다 보니 중국 측 요구를 너무 많이 수용하게 됐고 결정적으로 6·25 전쟁 참전에 대한 중국의 사과나 유감 표명을 확실히 받아내지 못했다. 이는 중국이 한국전쟁을 ‘항미원조(抗美援朝·미국에 대항해 조선(북한)을 도운) 전쟁’으로 표현하는 등 역사 왜곡의 빌미를 제공한 원인 중 하나가 됐다.
이와 관련 김 이사장은 “실제 교섭당사자들이 시간적 압박 때문에 6·25 남침 시 중국의 참전에 대한 사과 등 주요 쟁점에 대해 끝까지 물고 늘어지지 못한 감이 있다”고 회고했다.
그러면서 “중국이 1989년 6월 천안문 사태로 국제사회의 제재를 받아 미국의 봉쇄정책에 매우 곤혹스러울 때, 한국은 이를 풀어주기 위해 가능한 도움을 주려는 분위기였다”고 설명했다.
덧붙여 “한국 정부는 중국이 전 세계 공산권의 붕괴 도미노 속에서 일부 수교국가의 이탈 징후를 제어하기 위해서라도 한국과의 수교를 서두를 필요가 있다는 점을 인식하면서도 이 점을 강조해 밀고 당기기를 시도하는 과정을 건너뛰었다”고 평했다.
김 이사장은 수교 후 양국 관계발전 과정에 대해서도 쓴소리를 이어갔다.
그는 “한국이 중국에 친구처럼 잘 도와주면 중국도 그에 상응하는 보답을 할 것이라는 순진한 환상에 빠졌었다”며 “한국은 수교 전후의 낙후한 중국 경제 사회에 대해 과도한 우월감과 자신감을 가졌다”고 되짚었다.
또한 “한국 정부나 기업은 간을 빼주듯 중국에 기술을 거의 무제한 전수해 한국의 상대적 우위를 쉽게 포기했다”며 “한국을 대표하는 인사들이 한중관계 강화만 중요시한 나머지 매국 행위라 할 정도로 중국의 이익을 위한 역할을 서슴지 않았다”고 꼬집었다.
끝으로 “역사적으로 한국은 주요한 세력전이의 시기에 올바른 전략 선택에 실패함으로써 고난을 겪은 경험이 있다”고 우려하며 “미중 패권 전쟁의 최전선에서 국익의 냉정한 판단과 정책 선택을 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발제자로 나선 최창근 중국전략연구소 책임연구원은 “중국과 수교를 추진하던 한국이 직면해야 했던 큰 문제는 대만 문제였다”고 말했다.
중국이 수교국들에게 ‘하나의 중국 원칙’을 내세워 대만과의 외교관계 단절을 요구해 한국 역시 중국과 국교 정상화를 위해서는 대만과 외교 관계를 단절해야 하는 딜레마에 빠졌으나 결국 한국이 이를 수용함으로써 대만과의 단교는 불가피하게 됐다.
최 연구원은 “일방적인 단교 조치 통보와 더불어 한국이 대만과의 단교 과정에서 앙금을 남긴 다른 이유는 명동 대사관 및 부산 총영사관저 처리문제였다”고 설명했다.
그는 “당시 대만 정부는 단교 후 대사관 소유권이 중국으로 넘어가는 것을 막기 위해 제3자에게 매각을 추진하거나 장제스총통기념사업회(中正文教基金會) 명의로 소유권을 이전하려고 시도했다”고 했다.
이에 한국 정부는 국가안전기획부(현 국가정보원)에 ‘대만대사관 처리 전담팀’을 두고 처리 동향을 주시했고, 여기에 한국 내 화교들의 반발도 대사관 매각이나 명의변경을 어렵게 하는 요인으로 작용했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최 연구원은 “수교 협상 과정에서 중국 측은 수교의 전제 조건 중 하나로 명동 대사관 소유권 이전을 강력히 요구했고 한국 정부도 이를 수용해 명동 대사관을 수교 후 중국정부로 넘겨주기로 결정했다”며 “결과적으로 수교 일정 통보와 대사관 소유권 이전 문제는 대만 측에 단교의 앙금을 남긴 결정적인 원인 중 하나로 작용했다”라고 풀이했다.
이어 “당시 노창희 외무부 차관은 자신의 회고록에서 대사관 문제를 비롯한 대만과의 단교 처리과정에 문제가 있었음을 언급했다”고 덧붙였다.
조성환 경기대 교수(사회정의를바라는전국교수모임 공동대표)는 “미중간 충돌은 경제와 정치가 분리돼 있지 않다”며 “통상적으로 미국과 중국이 사이가 좋을 때는 안미경중(安美經中·안보는 미국, 경제는 중국)이 가능하지만 미중관계가 협조나 화해가 아닌 대립, 충돌로 갔을 때 안미경중은 기회주의다”라고 말했다.
조 교수는 “한국과 미국은 단순한 군사동맹을 넘어 의식과 가치를 공유하는 동맹”이라며 “한미동맹을 상수로 해야 중국과의 대등한 관계를 맺을 수 있다”고 강조했다.
/ 취재본부 이윤정 기자 [email protect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