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가니스탄 철군을 관철한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의 외교적 리더십이 시험대에 올랐다. 공화당은 물론 친정인 민주당에서까지 비난이 빗발치자 바이든 대통령은 “아프간 붕괴가 예상보다 빨랐다”고 시인했다.
바이든 대통령은 16일(현지 시각) 백악관에서 대국민 연설을 갖고 “아프간 정부가 미국의 대규모 대피 계획을 방해했다”며 탈레반과 맞서지 않고 도주한 아프간 정치 지도자와 군 고위층을 비난했다. 15일 아프간 정부의 항복 선언 이후 발표한 첫 공식 입장이다.
바이든 대통령은 아프간 수도 카불에서 벌어지고 있는 혼란상과 관련해 “백악관 관리들과 미 정보 당국자들이 아프간 상황을 면밀히 감시하고 있다”고 말했다. 아직 많은 미국인과 외국인들이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는 상황을 염두에 둔 것으로 보인다.
바이든 대통령은 또한 20여년에 걸쳐 진행된 미국의 아프간 임무는 9·11 테러의 배후인 테러조직 알카에다 제거였으며, 국가 건설이나 민주주의 구축이 아니었음을 강조했다.
그러면서 자신은 철군 합의를 이행하느냐 다시 군을 전투에 투입하느냐 가운데 선택해야 했으며 그 결정에 대해 후회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도널드 트럼프 전 행정부는 재임 당시 탈레반과 아프간 철군에 합의하고 올해 5월 1일까지 군대를 모두 철수하기로 했다. 바이든 대통령은 이 합의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며, 아프간 붕괴의 책임 일부를 트럼프 전 대통령에게 돌렸다.
하지만, 트럼프 전 대통령은 “미국에 도움을 준 민간인과 다른 사람들을 대피시키기 전에 우리 군을 철수시킨다는 일을 상상조차 할 수 있겠나”라며 자신이라면 그렇게 철수시키지 않았을 것이라는 말로 바이든 대통령의 철수 전략을 비판했다.
스티븐 밀러 전 백악관 선임보좌관은 “(바이든은) 트럼프의 평화 계획과 출구 전략을 폐기했다”면서 “당초 이 계획에는 ‘강력한 억제력’이 포함돼 있었지만, 바이든 대통령은 독자적인 철수 계획을 세웠고 이 계획은 부스러졌다”고 지적했다.
바이든 대통령은 지난 주말을 캠프 데이비드에서 보내며 아프간 철군을 살펴봤지만, 현재의 철군 방식은 위험하다는 미군 정보당국의 보고를 무시하고 최악의 철군을 선택했다는 초당적 비판을 피하지 못했다.
전직 국방부 관리들과 군 장성들 역시 1975년 ‘사이공 함락’에 비유하며 실망감을 감추지 않았다. 사이공 함락은 미국이 베트남전에서 패배한 뒤 대사관 직원들이 대사관 옥상에서 미군 헬기를 타고 쫓기듯 탈출한 사건을 가리킨다.
바이든 대통령은 지난달 아프간과 관련한 발표에서 “사람들이 미국 대사관 지붕에서 (헬기로) 들려 올려지는 상황은 없을 것”이라며 장담했지만, 미국이 치욕스럽게 생각하는 사건은 결국 재현되고 말았다.
미국의 외교적 리더십도 흔들리고 있다. 보리스 존슨 영국 총리와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 등 동맹국 지도자들은 바이든 행정부가 미국인과 외국인의 철수를 처리한 방식에 대해 공개적으로 실망감을 나타냈다.
실패로 평가된 철군은 미 국방부의 상황 오판에 기인한다. 국방부는 지난 6월까지만 해도 탈레반의 아프간 장악에 6~12개월이 걸릴 것으로 예상했다. 또한 일주일 전까지도 아프간 정부 붕괴에 ‘90일은 걸릴 것’으로 보고하는 등 정세를 정확히 내다보지 못했다.
한편, 백악관 국가안보팀 고위 관계자들과 국무부 관리들은 바이든 대통령의 대국민 연설에 앞서 방송에 출연해 아프간 정부군의 무기력한 대응을 비판했다.
/잭 필립스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