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자바오(溫家寶) 전 중국 총리가 이달 초 청명절(4월 4일)을 맞아 지난해 말 세상을 떠난 모친을 추억하는 글을 쓰면서 가정사를 털어놓아 눈길을 끈다. 중국에서는 청명절에 성묘하는 풍습이 있다.
“살얼음판을 걷는 듯하고 심연에 다다른 듯해”
원자바오는 2012년 은퇴했는데 중난하이에 28년간 몸을 담고 있었고 10년간 총리 생활을 했다.
마카오 잡지 마카오도보(澳門導報) 최근호(3월 25일~4월 15일) 기고문에서 원자바오는 “나 같은 출신에게 ‘벼슬자리’는 우연이었다. 나는 살얼음판을 걷는 듯, 심연에 다다른 듯 (如履薄冰, 如臨深淵·여리박빙, 여림심연) 신중하게 명령을 따랐고, 직무 초기엔 항상 귀향만 생각했다”고 썼다.
여리박빙, 여림심연은 시경에 나오는 한 대목이다. 바로 앞 구절은 겁을 먹고 벌벌 떨며 매우 조심한다는 뜻의 ‘전전긍긍(戰戰兢兢)’이다. 흔히 ‘전전긍긍한다’는 말의 기원이 된 구절이기도 하다.
원자바오는 글에서 “어머니는 평생 동료, 이웃, 일반 백성들과 사귀었지, 관직에 있는 사람과 인척 관계를 맺은 적이 없다. 어머니와 아버지는 평생 교육에 종사하며 박봉으로 살았고, 돌아가신 후에도 재산이나 저축을 남기지 않으셨다”고 말했다.
원자바오는 어머니의 편지 두 통을 보관해 왔다고 밝혔다.
첫 번째 편지는 2003년 11월 총리 첫 임기 시절, 그에게 “위아래 사람들과 잘 지내야지, 나무 하나로는 숲을 이룰 수 없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두 번째 편지는 2007년 10월 그의 두 번째 총리 시절 받은 것으로, “모두 한배를 타고 5년을 잘 헤쳐나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원자바오는 1989년 5월 중공 중앙판공실 주임으로서 자오쯔양(趙紫陽) 총서기를 대동하고 톈안먼에서 학생들을 말리는 장면으로 유명하다.
그는 중난하이에 몸담고 있는 것이 “살얼음판을 걷는 것과 같다”며 늘 고향으로 돌아갈 생각을 했다고 한다. 자오쯔양의 쓸쓸한 말로를 목격하는 그는 관료사회의 불안과 음험함을 몸소 체험한 인물이다.
“정부 법령은 중난하이에서 나오지 않는다”
원자바오는 2002년 총리에 취임했지만, 2004년 장쩌민(江澤民) 전 당수가 군사위 주석에서 물러난 뒤에도 그의 심복인 쉬차이허우(徐才厚)와 궈보슝(郭伯雄) 등이 군권을 틀어쥐면서 후진타오(胡錦濤)를 허수아비로 내세워 후진타오∙원자바오가 집권한 10년 동안에는 ‘정부 법령이 중난하이에서 나오지 않는’ 사태를 초래했다.
가장 잘 알려진 건 2008년 문천(汶川) 대지진 당시 원자바오가 재해 지역으로 달려갔지만, 군대가 “날씨가 좋지 않다”는 이유로 움직이지 않자 화가 나 “알아서들 하라!”고 전화를 건 것이다. 이후 천빙더(陳炳德) 당시 총참모장은 당 매체의 기고문을 통해 “당시 군부의 모든 행동은 ‘군사 위원회 수장’인 장쩌민의 결재를 받아야 했다”고 밝혔다.
원자바오는 또 연설에서 인권, 법치, 민주, 헌정 등의 개념을 자주 언급해 사람들에게 보편적 가치를 외면하지 않는다는 특별한 인상을 남겼다.
2012년 3월 14일 중공 전국인민대표대회 폐막 후 원자바오가 가진 마지막 기자회견에서 충칭(重慶) 사태에 대해 “정치 개혁을 하지 않으면 문화대혁명의 비극이 재발할 수 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중국의 여러 문제를 잘 알고 있다면서 경제체제 개혁뿐 아니라 정치체제의 개혁, 특히 당과 국가지도체제의 개혁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원자바오는 이번 모친회고록에서 문화혁명 기간 중 “아버지가 학교에 갇혀 야만적인 ‘심문’과 폭언을 받아야 했다”며 문화혁명에 대한 후환이 마음속 깊숙이 자리 잡고 있음을 보여줬다.
중난하이 내부 분열
최근 몇 년간 중공 내부는 안팎의 우환으로 인한 분열이 심해졌다. 지난해 8월 시사∙정치 평론가 천포쿵(陳破空)은 1인 미디어를 통해 “베이다이허 회의에서 중공 현직 고위층과 정치 원로들이 홍콩을 놓고 줄다리기를 벌였다”며 “가장 주된 시각 차이는 홍콩 문제로, 정치 원로들은 시진핑 측의 결정에 동의하지 않았지만, 그의 결정을 뒤집을 수는 없었다”고 전했다.
천포쿵은 “원자바오는 당시 시진핑 측에 ‘우리가 할 말은 다 했으니 알아서 하라’는 말만 남겼다”고 밝혔다. 천포쿵은 만약 사고가 나면, 전적으로 시진핑 측이 책임져야 한다는 것이 원자바오의 뜻이라고 주장했다.
원자바오는 톈진시 난카이(南開)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1960년 베이징 지질학원(현 중국 지질대학)에 입학했다. 2012년 퇴직 후에 종종 모습을 드러낸다.
대홍수 때 사진으로 모습 드러내, 희끗희끗한 머리
지난해 6월 란저우대(蘭州大) 공식 홈페이지에 따르면 원자바오는 학교 초청으로 란저우대 지질과학∙광물자원 대학원에 ‘큰길엔 끝이 없고 정성은 영원하다’는 대학원 교훈을 썼다.
당시 중국 남부에서 홍수가 한창이었는데, 7명의 중공 정치국 상무위원은 나타나지 않았고 원자바오가 나타나 추측을 불러일으켰다. 원자바오는 재임 당시 중국 전역에서 수해, 지진 등 대재앙이 발생하자 일선에 나서 친(親)서민 이미지를 남겼다. 후진타오 역시 마찬가지다.
란저우대는 학교 지도자 2명이 원자바오와 함께 찍은 사진 한 장도 게재했다. 사진 속 원자바오의 머리는 희끗희끗했다.
‘공평하고 정의로운 나라’ 기대해
회고록에서 원자바오는 마지막에 “내 마음속 중국은 공평하고 정의로운 나라여야 한다. 그곳은 사람의 마음과 사람의 도리, 사람의 본질에 대한 존중으로 가득하고 영원한 청춘과 자유, 분투의 기질이 가득하다. 나는 이를 위해 소리 지르고 분투한 적 있다. 이것은 삶이 나에게 알려준 진리이자 어머니께서 주신 것”이라고 말했다.
그가 여기서 말한 ‘공평하고 정의로운 중국’, ‘사람의 마음과 사람의 도리, 사람의 본질에 대한 존중’이 있는 중국은 시진핑 같은 인물의 시대와는 확연히 다르고, 지금의 이 현실과도 굉장히 동떨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