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팔’처럼 재미있고 공감할 수 있는 드라마 많이 나왔으면”

[인터뷰] 문화평론가 정덕현

이윤정
2020년 11월 15일 오후 8:53 업데이트: 2020년 11월 17일 오전 1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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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15년 11월 6일 국내 케이블TV 채널 tvN에서 첫 방송된 ‘응답하라 1988(이하 응팔)’. 20부작으로 방영된 응팔은 그 시대에 젊은 날을 보냈던 사람들의 추억을 소환하며 숱한 화제를 낳았고, 그 시절에 태어나지도 않은 젊은 세대까지 TV 앞으로 불러 모았다.

드라마는 2016년 1월 16일 마지막회 방송이 케이블 역대 최고 시청률인 19.6%(닐슨코리아·유료플랫폼 기준)를 기록하며 막을 내렸고 이후 중국, 일본을 비롯해 아시아권에서 큰 인기를 끌며 K드라마 팬덤을 선도했다.

정덕현 대중문화평론가는 “‘응답하라’ 시리즈인 응사, 응칠 등 한국 콘텐츠들이 대표적 OTT(온라인 동영상 서비스)인 넷플릭스를 통해 해외에 많이 알려졌고 한국의 콘텐츠들은 ‘로컬의 글로벌화’라는 넷플릭스의 정책과도 잘 맞아떨어졌다”고 분석했다.

그는 “지금 전 세계적으로 새로운 콘텐츠에 대한 소비 욕구가 증가하면서 다양한 로컬 콘텐츠들 속에서도 보편적 가치를 담고 수준 높은 퀄리티에 완성도 갖춘 작품을 요구한다”며 “응팔은 한국적 로컬의 특성을 잘 드러내면서도 글로벌한 소비 욕구를 만족시킨 드라마”라고 평가했다.

응팔은 올해 1월부터 넷플릭스를 통해 공개되면서 미국 등 서구권에서도 상당한 호평을 받는 것으로 알려졌다. 드라마 종영 당시 미국 주간지 <뉴요커>의 한 기자는 싱가포르 동영상 스트리밍 플랫폼 비키(ViKi)를 통해 응팔을 시청한 뒤 응팔의 인기 요인을 분석하는 기사를 쓰기도 했다.

‘응답하라 1988’을 분석한 미국 주간지 뉴요커 | 뉴요커 홈페이지 캡처

우리와 문화가 비슷한 아시아에서는 그렇다 쳐도 종영한 지 5년이나 지난 드라마를 우리와 다른 문화권의 서양인들까지 좋아한다는 점이 얼핏 이해가 안 되지만, 정 평론가는 서양인들까지 공감할 수 있는 응팔의 핵심 포인트를 ‘가족’이라고 분석했다.

그는 “누구나 가족이라는 틀 안에 있고 그 안에서 이루지 못한 부분에 대한 판타지가 내재돼 있다”며 “드라마는 현실을 그대로 보여주는 게 아니라 현실에서 결핍된 부분들을 채워주기 때문에 현실적 결핍이 많은 사람일수록 드라마에 빠져들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응답하라 1988’… 성공할 수밖에 없는 이유

미국 영화나 드라마에서는 흔히 볼 수 없는 ‘끈끈한 가족’이란 컨셉을 보면서 경험하지 못한 것을 누려보고 싶은 부러움이 생길 수 있다. 이것이 ‘한국의 로컬’이 세계 시장에서 소비되는 가장 큰 힘의 근원이라는 것이 정 평론가의 분석이다.

“요즘에는 다른 나라 드라마들도 가족 문제를 많이 풀어내고 있다. 가족애, 우정, 남녀 간의 사랑 같은 보편적 가치들을 다 끌어모아서 종합선물세트처럼 만든 응팔은 충분히 먹힐 수 있는 코드다.”

응팔의 또 다른 성공 요인을 그는 디테일한 감정 묘사에서 찾았다.

정 평론가는 “매회 여러 에피소드가 압축적으로 구성돼 마치 시트콤처럼 유쾌한 웃음, 눈물이 흐르는 감동 포인트를 같이 엮어 시청자들이 감정의 롤러코스터를 타게 만드는 것이 한국 드라마(콘텐츠)들이 가진 힘이고, 그러한 에피소드들을 잘 구성해냈다는 게 응팔의 강점”이라고 강조했다.

이 드라마에서 그려지는 가족, 친구, 이웃 관계는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는 찾아보기 힘들다. 응팔은 누구에게나 보편적인 듯한 이야기를 다루면서도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 얘기도, 존재하는 얘기도 풀어내며 여러 세대를 폭넓게 아우르는 공감대를 자아냈다.

그 시대에 태어나지 않은 젊은 사람들까지 조금은 촌스럽고 화려하지 않은 소소한 일상에 공감하는 것에 대해 정 평론가는 뉴트로(뉴+레트로) 같은 특이한 현상이라고 분석했다.

정 평론가는 “직접 겪어보지 못한 시대와 문화를 ‘새로운 것’으로 받아들이고 신기해하면서 공감하는 부분들도 생긴다. 외국인들도 같은 관점에서 이를 받아들이게 된다”며 “옛날 소재를 갖고 현재의 장르나 이야기 구조에 맞게 세련되게 연출함으로써 그 가치가 드러나도록 만들어진 것이 바로 응팔이다”라고 높이 평가했다.

정덕현 대중문화평론가 | 사진=이유정 기자/에포크타임스

그렇지만 서양인들이 사투리, 유행어까지 이해할 수 있을까. 유리 파편이 위에 박힌 담벼락이나 골목 한쪽에 쌓인 연탄재를 보면서 우리와 같은 느낌이 들 수 있을까.

정 평론가는 “그게 로컬에서 글로벌로 넘어갈 때 가장 어려운 부분”이라고 지적했다. 중간에서 정확하게 번역해주지 않으면 그런 뉘앙스까지 전달되기는 어려운데, 최근 각종 번역 앱이나 미디어들이 발전하면서 한국 콘텐츠들이 해외에서 많이 어필되고 있다고 전했다.

정 평론가는 콘텐츠 이용자들의 소비 방식 변화도 한몫했다고 분석했다.

“어떤 한 작품에 사람들이 빠지기 시작하면 그 작품을 보는 데에서 끝나는 게 아니라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통해 작품에 등장한 음식, 사건 등에 관해 알아보고 토론하면서 이해의 폭을 넓히는 현상들이 일어나고 있다.”

즉 콘텐츠 소비 방식이 과거의 일방적, 일회성 구매에서 한 단계 더 나아가 ‘구독 개념’으로 바뀌었다는 점에 주목했다. 소비자들은 일방적으로 콘텐츠를 수용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같은 콘텐츠를 열광하는 팬덤들 사이에 섞여 상호교환하며 빈 부분을 채우고 콘텐츠에 기여하고 싶어 하는 욕구들을 강하게 분출하고 있다는 것이다.

정 평론가는 다시 응팔로 돌아가 응팔의 성공 요인 중 하나로 기존 한국 드라마와는 다른 제작방식을 꼽았다. 과거 한국 드라마들은 대부분 작가 중심의 톱다운 방식으로 제작됐는데, 응답하라 시리즈 이후 수평적 구조로 변화가 이뤄지고 있다는 것이다. 여러 작가와 PD들이 같이 모여서 대본 작업부터 공동으로 하는 미국식 협업 방식은 참여한 사람들의 다양한 아이디어와 취향을 응집시켜 강력한 시너지를 일으키는 장점이 있다.

그는 “한 작품 안에서 다양한 목소리가 나오고 어우러져 있기 때문에 드라마를 보는 사람들은 등장인물들의 우정이든 성장사든 복고적 분위기든 어느 부분에서건 몰입할 수 있는 지점이 생긴다”며 새로운 작업 방식이 응팔에 미친 긍정적 영향을 집어냈다. 그래서 응팔은 그만큼 폭넓은 소비층을 확보할 수 있었고, 그 힘은 몇 년이 지난 지금 해외에서까지 먹히고 있다고 보는 것이다.

응답하라 1988 | 홈페이지

드라마, 공감을 통한 사회 변화

정 평론가는 응팔이 사회적 인식 변화에도 영향을 미쳤다고 분석했다.

극 중 아버지(성동일)가 덕선(혜리)에게 그동안 잘 못 해준 것을 미안해하면서 케이크를 사주면서 “아빠도 아빠가 처음인데, 그러니까 우리 딸이 좀 봐줘”라고 말하는 장면이 있다.

응답하라 1988 | 영상 캡처

가부장제 사회에서 자란 아버지라면 이 장면을 보고 ‘나도 내 아이한테 잘못한 부분을 인정하고 미안하다고 얘기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혹은 드라마를 본 사람들이 커뮤니티를 통해 공감하고 이를 공유하는 과정에서 공감의 폭이 넓어지면 자연스럽게 아버지의 역할이 조금씩 변화할 수 있지 않을까. 단번에 변하진 않아도 이런 게 문화 콘텐츠의 힘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측면에서 응팔도 그런 역할을 충분히 했고 새로운 가족상을 환기했다.

정 평론가는 요즘 한국 드라마의 흐름을 양 갈래로 분석했다. 하나는 미국 드라마식으로 구조화되고 현실감각을 많이 집어넣은 장르물들이 한 궤를 이루고, 또 다른 하나는 기존 드라마를 현대화하고 재해석하는 방식이다.

“응팔을 비롯해서 지금 시대에 우리는 어떻게 가족을 바라봐야 되는가 하는 얘기들을 메시지로 담는 형태의 드라마들이 최근 많이 만들어지고 있다”는 그는 “드라마에서 제일 중요한 포인트는 역시 재미”라고 강조했다.

“단순히 표면적 재미가 아니라 ‘사회적 공감대를 유발하면서 재미있는’ 드라마가 많이 나와야 하지 않을까요. 많은 사람이 꿈꾸는 사회를 실현해 보여주거나 제시해주는 드라마들이 많아지면 자연스럽게 사회를 변화하는 데에도 힘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