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세기 후반에 활동했던 이탈리아 화가 루카 조르다노(Luca Giordano, 1613-1699)는 특출난 두 가지 재능 때문에 오히려 손해를 본 경우다.
스페인 마드리드에 있는 세계적 미술관인 프라도(Prado) 미술관에 따르면 놀랍도록 그림을 빨리 그리는 능력과 다른 화가의 화풍을 그대로 따라하는 능력이었다.
그로 인해 조르다노는 활동 당시 동시대인들로부터 ‘작품이 깊이가 없다’, ‘유명화가를 따라 베낀다’는 편견에 시달렸다.
조르다노는 활동 초기 빛과 암흑의 대비를 극적으로 표현하는 스페인 바로크 화가 호세 데 리베라의 영향을 받았으나, 이후 빈틈없는 구도와 화려한 색채가 특징인 이탈리아 르네상스 화가 파올로 베로네세의 영향으로 어두운 화풍을 탈피했다.
조르다노는 스페인 국왕 카를로스 2세에게 초청돼 성공적인 궁정화가로 활동했다. 빨리 그리는 재능을 살려 궁정 벽면에 장식용 대형 프레스코화를 짧은 시간에 완성시킬 수 있었다.
그의 작품은 20세기 들어서야 재평가를 받으며 훌륭한 작품들로 인정됐다.
성전에서 환전상을 내쫓는 그리스도
조르다노의 회화 중에서 잘 알려진 작품으로 ‘성전에서 환전상을 내쫓는 그리스도’가 있다. 성경의 한 대목을 그린 이 작품은 그리스도가 과월절(파스카, 유월절)에 성전에서 상인과 환전상을 쫓아내는 순간을 담아냈다.
“예수님께서는 성전에 들어가시어, 그곳에서 사고팔고 하는 자들을 모두 쫓아내시고, 환전상들의 탁자와 비둘기 장수들의 의자를 둘러엎으셨다. 그리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나의 집은 기도의 집이라 불릴 것이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너희는 이 곳을 ‘강도들의 소굴’ 로 만드는구나.” – 마태복음 21:12~13
예수의 행동은 거칠고 가혹했다.
유다인들의 과월절이 가까워지자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에 올라가셨다. 그리고 성전에 소와 양과 비둘기를 파는 자들과 환전꾼들이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끈으로 채찍을 만드시어 양과 소와 함께 그들을 모두 쫓아 내셨다. 또 환전상들의 돈을 쏟아 버리시고 탁자들을 엎어 버리셨다. – 요한복음 2:13~15
예수는 평상시 모습과는 전혀 다르게 상인과 그 손님들에게 공격적인 모습을 보였다.
조르다노는 예수가 환전상들을 쫓아내는 바로 그 순간을 그렸다. 예수는 노끈으로 만든 채찍을 오른손에 쥐고 마치 환전상들을 향해 돌진하는 것처럼 보인다. 탁자가 엎어지고 환전상들은 달아난다. 배경의 인물들은 이 소란을 지켜보는 듯 하다. 해는 지평선에 걸렸고 그림 상단에는 어두운 구름이 보인다.
이 장면에서 조르다노는 한 가지 선택을 내린다. 사원 내부 대신 바깥 풍경을 그리기로 한 것이다. 그는 예수를 이 그림의 초점으로 만들기 위해 3가지 조형원리를 동원한다.
하나는 ‘대조’다. 예수는 그림 속에서 어둠과 밝음의 대비가 가장 큰 인물이다. 다른 등장인물이 많지만, 보는 이의 시선은 계속 예수에게로 끌린다.
다른 하나는 ‘대각선’이다. 예수의 뒷벽에 드리워진 그림자는 예수의 목 언저리로 이어지며 대각선을 이룬다. 우측 하단의 뒤집힌 테이블 옆면도 대각선으로 예수의 얼굴을 가리킨다.
보는 이의 시선이 예수에게로 머무는 마지막 요소는 ‘예수를 둘러싼 인물들의 시선’이다. 이들의 시선은 모두 예수에게로 향한다. 조르다노는 보는 이의 시선이 그림 속 다른 요소로 향하더라도 다시 예수에게로 돌아가도록 설정했다.
우리의 성전을 깨끗하게 하자
예수는 왜 사원에서 환전상을 쫓아냈을까? 조르다노는 왜 사원 내부 대신 외부를 그렸을까? 또 왜 조형원리를 사용해 예수를 초점으로 했을까?
이 질문에 대한 절대적인 정답은 없겠지만, 대답해볼 기회가 주어진다면 먼저 이런 질문을 던지고 싶다.
‘성전이란 무엇인가?’
“여러분이 하느님의 성전이고 하느님의 영께서 여러분 안에 계시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모릅니까? 누구든지 하느님의 성전을 파괴하면 하느님께서도 그자를 파멸시키실 것입니다. 하느님의 성전은 거룩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바로 하느님의 성전입니다.” – 고린도전서 3:16~17
우리 인간은 신의 성전이다. 우리 안에 신의 영이 ‘살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 인간 역시 신성한 존재다. 신의 영이 우리와 함께 있기 때문이다.
예수는 상인과 그 손님들을 모두 내쫓고 상품이 놓여 있던 탁자를 뒤엎었다. 그들의 행위로 성전은 세속화됐고, 성스러운 파스카는 이익을 내는 행사로 타락했다. 사사로운 이익 때문에 신을 기념하는 날을 빼앗긴 예수는 그대로 방관하지 않았다.
우리 역시 물질과 소유에 대한 집착에 빠질 수 있다. 물질적인 것에 지나치게 빠지게 될 때, 우리는 우리가 신의 영이 머무는 신성한 성전이라는 것을 잊어버리기 쉽다.
그래서 때로 우리는 “이제 그만”이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즉, 신의 영이 거하고 환영 받아야 하는 장소를 합당하지 못하게 만드는 요소들을 없애고 막아야 할 필요가 있다.
우리의 성전을 합당하게 준비하려면 어느 정도 공격성을 띠게 될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러한 공격성은 타인으로 향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 자신의 신성함을 인정하지 못하게 하는 이기적인 상태와 파괴적인 태도를 향한 것이다.
조르다노, 왜 성전 내부 아닌 외부 그렸나
조르다노는 애초부터 성전에서 장사하는 행위를 용납할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성전 밖에서 환전상을 내쫓는 예수를 묘사한 것일까?
만약 반대로 성전 안에서 장사하는 신을 모독하는 모습을 그렸다면? 성전의 내부는 신의 영이 머무는 곳이다. 이는 신성하지 못한 모든 것으로부터 격리되어야 한다. 조르다노는 성전 외부를 그림으로써 성전 내부를 이기심 없는 공간으로 보장하고 있다.
그러면 조르다노는 왜 예수를 이렇게 강한 중심점으로 만들었을까? 물질의 유혹보다 예수가 더 중요하다고 말하고 있는 것일까? 그렇다면 예수는 무엇을 상징할까?
아마도 마태복음의 한 구절이 우리에게 힌트를 줄 수 있을 것 같다.
“스승님, 율법에서 가장 큰 계명은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이것이 가장 크고 첫째가는 계명이다. 둘째도 이와 같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다. – 마태복음 22:36-39
만약 우리가 이기적인 마음으로 세속적인 재물을 얻기 위해 우리의 성전을 사용한다면 우리가 마음, 영혼, 뜻을 다해 신을 사랑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어려워진다.
우리 존재의 거룩함 역시 인정하기 어려워진다. 우리는 자신의 가치를 세속적인 재화를 통해 해석함으로써 우리의 존재를 경시하고 있다.
자신을 사랑하려면 마음과 영혼, 뜻을 다해 신을 사랑해야 한다. ‘어떻게 하면 신의 영이 거하는 성전이 될 수 있는가?’ ‘어떻게 하면 신의 영을 환영할 수 있을까?’ 이런 노력을 함으로써 우리는 자신의 존재가 신성할 뿐만 아니라, 우리의 이웃이 신의 영이 거처하는 성전임을 인식할 수 있다. 이웃을 사랑한다는 것은 역시 신의 성전을 사랑하는 것이고 따라서 신을 사랑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두 번째로 큰 계명이 첫 번째와 같은 이유이다.
조르다노의 그림은 이기심을 멀리해야 한다는 것을 일깨워 주고, 언제나 나를 신에게 가까이 두어 자신의 신성함에 대한 더 깊은 이해를 하도록 한다. 그것은 내 성전을 신을 환영하고 환대하게 하는 장소로 만들고, 그렇지 못한 성전 안의 모든 것을 쫓아 버리도록 돕는다. 또한 내 성전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성전을 사랑하도록 나를 상기시킨다.
예술은 보이지 않는 것을 나타내는 놀라운 능력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이것은 나와 이것을 보는 모든 사람에게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과거에 어떻게 영향을 미쳤으며 미래에 어떻게 영향을 미칠 것인가?’ ‘인간의 경험에 대해 무엇을 제안하는가?’라고 질문할 수 있다.
이는 필자가 ‘고전회화는 사람의 내면에 무엇을 남기는가(Reaching Within: What traditional art offers the heart)’ 시리즈를 연재하며 되묻는 질문이기도 하다.
*본문 중 성서 인용부분은 현대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현대어휘에 더 가까운 가톨릭성경을 기준으로 하였습니다.
에릭 베스(Eric Bess)는 현재 비주얼 아트 박사 과정을 공부하는 젊은 화가 겸 예술전문 기고가다. 고전회화를 중심으로 예술 작품 큐레이션에도 힘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