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년이 됐다. 그의 죽음은 한 시대를 열었고 또 한 시대를 마감했다. 그가 그립다. 마음속에 사람이 있는 지도자.” 칭화(清華)대 사회학과 궈위화(郭于華) 교수가 웨이보에 쓴 글이다. 여기서 지칭한 ‘그’는 후야오방 전 중국 공산당 총서기다. 그의 30주년 기일이 지난 15일이었다.
그러나 중국 공산당은 아무런 기념행사도 하지 않았고, 관영매체도 관련 기사를 거의 보도하지 않았다. 그러나 궈위화 같은 지식인과 네티즌, 그리고 1인 미디어가 이 80년대 지도자를 추모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소셜 플랫폼에 글을 올렸다. 또 전국 각지의 각계 인사들은 불원천리하고 장시(江西)성의 후야오방 묘지를 찾아 참배했다.
관(官)과 민(民)의 태도가 왜 이렇게 다를까? 왜 중국 정부는 침묵하고, 왜 민중은 30년째 한 번도 거르지 않고 추모하는가? 후야오방은 도대체 어떤 인물인가?
각종 ‘억울한’ 사건을 바로잡아준 지도자
나이가 많은 사람은 대부분 후야오방이 중국 공산당 역사상 매우 영향력 있는 지도자임을 잘 안다. 그는 문화대혁명 기간에 박해를 받았고 문화대혁명이 끝난 후 1982년 9월부터 1987년 1월까지 중국 공산당 총서기를 지냈다.
후야오방은 집권한 후 문화대혁명이 조성한 ‘억울한 사건, 허위로 조작한 사건, 오심 사건’을 바로잡았다. 그는 더욱 민주적이고 개방적인 정치 개혁을 주장해 지식인과 젊은이들 사이에서 매우 인기가 높았다. 자오쯔양(趙紫陽)의 정치비서 바오퉁(鲍彤)은 후야오방의 정신이 바로 ‘사상 해방’이고 ‘마오쩌둥 사상에서 해방돼 나오는 것’이라고 했다. 실천으로 옳고 그름을 검증했는데, 실제로 ‘마오쩌둥의 사상’을 부정하는 것이다. 모든 문제가 마오쩌둥의 의사결정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마오쩌둥은 ‘억울하고, 허위로 조작하고, 잘못 판결한’ 사건을 너무 많이 만들었다. 반면 후야오방의 주요한 정치 업적은 마오쩌둥이 조장한 그런 문제를 시정한 것이다.
바오퉁은 루산(廬山)회의에서 정한 ‘우경(右傾) 기회주의 분자’와 ‘반(反)우파’ 중에 덩샤오핑이 동의하지 않은 몇 명을 제외하고는 모두 명예회복됐고, 더 이전의 지주.부농 자녀와 AB단(團) 사건도 바로잡혔다. AB단은 1949년 이전의 사건인데 관련된 중국 공산당 내부와 간부 자녀에 국한되지 않고 지주와 부농 자녀까지 포함, 사회적으로 억울한 사건들은 모두 바로잡았다. 즉 후야오방은 마오쩌둥 독재 시절, 수년간 자행한 박해와 파괴를 전부 시정 대상으로 삼았다. 이것은 ‘매우 큰 사회적 해방’이다.
1989년 민주화운동 학생 지도자 중 한 명인 왕단(王丹)은 페이스북에 “오늘날 재위한 ‘훙얼다이(紅二代‧혁명가 2세)’, 그들의 부모를 후야오방이 명예회복시켜 주지 않았다면 지금도 죄를 뒤집어쓰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했다.
체제 내 보기 드문 ‘인간성’을 가진 지도자
모두가 알다시피 마오쩌둥의 눈에는 두 종류의 사람만 보인다. 하나는 반드시 타도해야 할 ‘적’이고, 다른 하나는 이용해야 할 ‘친구’다. 무릇 마오쩌둥을 따라가면 ‘친구’인 동시에 이용되는 도구가 되고, 어느 정도 따라가다 말면 새로운 적이 된다. 그의 전우도, 그가 직접 지명한 후계자 류사오치(劉少奇)와 린뱌오(林彪)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러나 후야오방이 한 일은 마오쩌둥과 정반대였다. 그는 사람을 ‘인간’으로 보았고, ‘투쟁의 대상’이나 ‘이용자’로 삼지 않았다. 바우퉁은 “그는 자신의 개혁이 ‘마오쩌둥의 잘못을 시정하는 것’이라고 말한 적은 없지만, 그가 한 일에서 그 같은 결론을 얻어낼 수 있다”고 했다.
누가 보아도 후야오방은 ‘보기 드문 개명하고 너그러운 인사’였다. 그의 ‘너그러움’과 ‘인간성’이 중국인들에게 상대적으로 여유롭고 자유로운 시대를 가져다주었다.
하지만 모두가 알다시피 중국 공산당은 결코 ‘인간성’을 용납하지 않는다. 후야오방의 ‘인간성’ 또한 중국 공산당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따라서 1987년 후야오방은 ‘자산계급 자유화’를 반대하는데 힘쓰지 않았다는 비난을 받고 해임됐다. 정계에서 물러난 그는 1989년 4월 15일 우울하게 생을 마감했다.
그의 죽음이 89년 민주화운동 촉발
후야오방의 죽음은 대규모 추모 행사를 불러일으켜 전 세계가 주목하는 민주화운동의 도화선이 됐고, 또 중국 공산당이 전 세계에 충격을 준 ‘6.4’ 대학살의 뇌관이 됐다.
먼저 베이징 대학생들이 톈안먼 광장에 모여 부패 반대를 외치고 언론자유와 민주제도 건설 등을 요구했다. 곧이어 각 지역의 대학생들이 호응했다. 이어서 전국 각지의 지식인 수천 명과 신문기자 그리고 사회 군중들이 속속 거리로 뛰쳐나와 항의 대열에 합류했다.
이 운동은 중국 현대사에서 가장 큰 항쟁 물결인바, 사실상 민주와 독재의 대결이었다. 그러나 결국 중국 공산당은 아무런 무기도 갖지 않는 학생과 민중을 학살하는 것으로 끝장을 냈다.
‘6.4’는 여전히 발생하고 있다
30년이 지났지만 ‘6.4’의 영향은 여전히 중국 사회에 존재한다. 중국 공산당은 여러 가지 방법으로 ‘6.4’와 톈안먼 광장 대학살을 민중들 기억 속에서 씻어내려 하고 있다. 하지만 중국 공산당이 상당히 난처한 것은 ‘6.4 대학살’의 발단이 바로 후야오방 총서기였다는 점이다.
이것이 바로 중국 공산당이 후야오방을 언급하지 못한 까닭이고, 민중이 30년 동안 한 번도 추모를 멈추지 않은 이유라고 할 수 있다. 한쪽에서는 ‘6.4 대학살’이 후야오방과 갈라놓을 수 없어 그를 기념하기만 하면 민중이 ‘6.4’를 떠올리는 게 문제고. 다른 한쪽에서는 중국 공산당이 현재 실시하고 있는 체제가 바로 ‘마오쩌둥 체제’일 뿐만 아니라 마오쩌둥 시대보다 더 완벽하고 더 엄격하게 통제하는 게 문제다.
바오퉁은 ‘6.4는 결코 끝나지 않았다’는 지론을 빈과일보(蘋果日報)를 통해 전했다.
“30년 동안 유사한 집단 민원 사건이 도처에서 일어나 지금까지 멈춘 적이 없지만, 모두 ‘6.4’와 마찬가지로 중국 공산당에 의해 짓뭉개졌다. ‘6.4’는 이미 중국 공산당에 일종의 제도 모델을 만들어 주어 통치자는 모든 ‘국가기구’로 서민을 다룰 수 있다. 따라서 ‘6.4 사건은 여전히 중국 땅에서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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