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를린 장벽이 자유를 가로막고 희망을 좌절시킨 시기, 몇몇 인물들은 장벽이 유럽의 영원한 경관으로 남아서는 안 된다며 역설했고 28년 뒤 장벽은 붕괴됐다. 그날 독일 시민들은 ‘환희의 송가’로 자축했고 세계는 감탄했다.
그러나 다시 28년이 지난 지금, 무형의 장벽은 여전히 굳건했다. 유럽을 배회하는 유령은 계속 바이러스를 퍼뜨리고 생명을 억압하며 영혼을 비틀고 있다. 우리는 1억 여 명의 시민들이 어떻게 목숨을 잃었는지 기억해야 한다. 현재 이 세계에는 다시금 붉은 물결이 일렁이고 세기의 피비린내가 진동하고 있다. 공산주의의 거짓과 악몽에서 어떻게 벗어나야 하는가?
‘수치의 벽’, 철의 장막의 상징
2차 세계대전 후, 독일과 베를린은 구소련, 미국, 영국 및 프랑스에 의해 4개 점령지로 분할됐다. 1949년에는 동독과 서독으로 나뉘어 두 개의 주권 국가로 자리 잡았다. 구소련의 점령지역인 동독은 동베를린을, 영미법(美英法)의 관할 하에 있는 서독은 본(Bonn)을 수도로(통일 전까지) 삼았다. 법률 규정 상 서독의 영토였던 서베를린은 마치 섬처럼 동독 한가운데 있어 ‘자유세계의 쇼윈도’로 불리기도 했다.
1949~1961년에만 약 250만 명의 동독인이 사살될 위험을 무릅쓰고 서베를린으로 탈출을 시도했다. 이를 지켜본 구소련은 1950년대 초 동유럽 국가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고, 서방 국가로의 도주를 막으라고 지시했다. 1961년 8월 13일 동독 정부는 베를린 장벽 건설에 나섰다. 공사 초기에는 철조망과 벽돌을 재료로 사용했으나 이후 감시탑, 콘크리트 벽, 개방 지대 및 차량 통행 방해물 등으로 구성된 방어시설을 보강했다. 전방위 폐쇄 국경 수비시스템으로 거듭난 장벽은 그 길이만 167.8km에 달했다. 동독은 이 벽을 ‘반파시즘 방위벽’이라고 불렀다.
베를린 장벽 증축 후인 1961~1989년에는 약 5,000명의 시민들이 이 벽을 넘어 탈출을 시도했고, 이중 사살된 인원은 136~245명으로 추정된다. 나머지 3,221명은 체포됐으며 260명은 부상을 입었다. 그러나 천여 명의 시민들은 장벽의 서쪽 측면을 통해 탈출에 성공하기도 했다. (주: 1960년부터 <총기 발사령>이 발효되어 동독 진영의 방어군이 불법으로 국경을 통과하는 자에게 총기 사격이 가능해졌다.)
1961년 부임한 미국 딘 러스크(Dean Rusk) 국무 장관은 “장벽이 유럽의 영원한 풍경이 되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소련이 장벽을 왜 필요로 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 그들의 입장에서 이 장벽은 공산주의의 실패를 드러내는 기념비밖에 되지 못한다”고 밝혔다.
1963년 6월 25일 케네디 대통령은 서베를린 시청의 장벽 앞에서 ‘나는 베를린 인입니다’라는 제목의 연설을 발표했다. 이날 연설은 “자유에는 많은 어려움이 따르고, 민주주의도 완벽하지는 않다. 그러나 우리는 장벽을 세워 우리 국민을 가둔 적이 없으며, 그들이 우리를 떠나지 못하게 막은 적도 없다”라는 발언으로 유명하다.
“이 장벽을 무너뜨리자”
1987년 6월 12일은 냉전 역사에서 중요한 순간으로 꼽힌다. 이날은 동서 베를린의 교차 지역을 방문한 로널드 레이건 미국 대통령이 브란덴부르크 문(Brandenburger Tor)에서 연설을 하며 당시 소련의 고르바초프(Mikhail Gorbachev) 총서기에게 베를린 장벽 철거를 호소했다. 레이건 대통령은 “우리는 개혁과 개방을 즐거운 마음으로 지켜보고 있다. 자유와 안전이 병행될 수 있음을 믿기 때문이다. 인류 자유의 발전이 세계 평화를 추구하도록 만든다. 소련은 아주 명확한 일, 자유와 평화로 한 발 나아갈 수 있는 큰일을 할 수 있다. 고르바초프 총서기님, 당신이 평화를 원한다면, 소련과 동유럽의 번영을 원한다면, 당신이 자유를 원한다면 문을 열어 달라!”라고 말했다.
연설 말미에 레이건 대통령은 “얼마 전 나는 국회 빌딩에서 ‘독일 통일 실현’을 바라보았다. 장벽에 페인트로 크게 쓰인, 어느 베를린의 청년이 쓴 것이리라 생각된다. ‘이 장벽은 무너질 것이다. 신념은 반드시 실현된다’라는 글귀였다. 그렇다, 이 장벽은 유럽에서 사라질 것이다. 장벽은 신념을 이기지 못하며, 진리를 당해내지 못한다. 장벽은 자유를 막지 못한다”라고 덧붙였다.
29개월 후 대변화가 찾아왔다. 동유럽 국가의 정치 변혁이 연이어 일어나면서 동독 국민들이 수주에 걸쳐 항의 시위를 진행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1989년 11월 9일 동독 정부는 여행 제한을 해제하고 서독 및 서베를린을 방문하도록 허용했다. 그런데 당시 이 소식을 발표한 관료가 상부의 지시를 오인하여 베를린 장벽 개방을 선포하고 말았다. 언론을 통해 이 소식은 확산되면서 같은 날 저녁 동독인들이 장벽 주변으로 집결했다. 서베를린으로 넘어갈 수 있기를 기다렸던 것이다. 서독인들 역시 장벽의 반대편에서 꽃다발과 샴페인을 들고 환영할 준비를 마쳤다. 그 뒤 며칠 동안 엄청난 수의 동독 시민들이 거리로 나와 장벽을 부수고, 부서진 조각을 기념품으로 간직했다. 이것이 바로 ‘베를린 장벽 붕괴’ 사건이다.
1989년 12월 25일 독일 통일을 축하하기 위해 유명한 지휘자인 레너드 번스타인(Leonard Bernstein)이 베를린 음악당에서 베토벤 9번 교향곡을 지휘했다. 그는 ‘환희의 송가’ 중 ‘환희’를 ‘자유’로 바꾸어 연주했다. 이 공연에는 동독, 서독, 영국, 프랑스, 미국, 소련 등 국가에서 온 천 여명의 연주자와 합창단이 참여했고, 20여 개 국가의 1억 명 이상의 시청자들이 생방송으로 지켜봤다.
1990년 6월, 동독 정부는 공식적으로 장벽을 철거하기로 결정했다. 같은 해 7월 21일, 영국의 록 싱어 로저 워터스(Roger Waters)는 포츠담(Potsdam) 광장에서 ‘장벽(The Wall)’을 불렀다. 미국의 배우 데이비드 해셀호프(David Hasselhoff)는 베를린 장벽 위에서 ‘자유를 찾아서(Looking for Freedom)’라는 노래를 불렀다.
1990년 10월 3일 도이치 민주공화국(동독)이 도이치 연방공화국에 가입함으로써 독일과 베를린은 완전히 통일되었다. 장벽 붕괴 후, 동서 베를린의 도로, 철도 및 다리가 빠르게 연결되었다.
기념과 반추(反思)
베를린 장벽의 기억은 시간의 조류 속에서도 사라지지 않았다. 수많은 독일인들은 여전히 이 시간을 반추하며 고통을 느끼고 반성의 시간을 갖는다.
2011년 8월 13일은 ‘베를린 장벽’ 축조 50주년이었다. 독일 각지에서는 다양한 행사가 개최됐다. 행사에서는 당시 장벽을 넘다 동독 군경에게 사살된 무고한 희생자들을 추모했다. 울딩겐(Uhldingen) 거리 베를린 장벽 기념관 앞에서 열린 기념행사에서 독일 크리스티안 울프(Christian Wolff) 대통령은 당시 1900만 독일인이 전제 제도에 갇혀 이 ‘수치의 벽’ 뒤에 있었다고 말했다. 이어서 수천 수만의 사람들이 자신의 생활방식을 선택할 수 없는 상황에 놓여 있었다며 1989년의 ‘베를린 장벽 붕괴’는 역사의 필연적 과정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장벽의 붕괴야말로 ‘자유는 무너지지 않는다’ ‘어떠한 장벽도 오랫동안 인간의 자유의 소망을 막을 수는 없다’는 사실을 증명한다고 밝혔다.
클라우스 보버라이트(Klaus Wowereit) 베를린 시장 역시 “베를린 장벽은 과거 수치의 상징이었으며,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베를린 장벽은 전제 제도의 산물이다. 역사를 직시하지 못하고 베를린 장벽에 향수를 느끼는 사람들, 통일된 독일의 역사적 의의를 바로 보지 못하는 사람들, 소위 ‘역사적 원인’ 핑계로 베를린 장벽을 외면하는 사람들은 동정 받을 자격이 없다”고 말했다.
2014년 11월 베를린 장벽 붕괴 25주년에 메르켈 독일 총리는 인터넷 팟캐스트에서 “저는 여러분이 그날의 느낌을 영원히 잊지 않았으면 합니다. 적어도 저는 절대 잊지 않을 것입니다. 저는 35년을 기다려 그러한 자유의 감정을 만끽했고, 제 인생도 바뀌었습니다”라고 말했다. 또한 메르켈 총리는 “베를린 장벽 붕괴는 우리가 전제, 폭력, 이념과 복수의 장벽을 넘어뜨릴 수 있다는 신념을 보여줬습니다”고 밝혔다.
“장벽은 붕괴됐지만 공산주의는 아직 남아 있다”
2014년 11월 6일 월스트리트 저널(The Wall Street Journal)은 <베를린 장벽은 붕괴됐지만 공산주의는 아직 남아 있다>라는 제목의 글을 게재했다. 글쓴이는 ‘공산주의 피해자 기념 기금회’의 마리온 스미스(Marion Smith) 이사였다.
스미스 이사는 독자들에게 장벽을 넘다 희생된 이들을 기억해야 하며, 공산 정권이 여전히 건재하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고 지적했다. “우리는 15억 명의 사람들이 여전히 공산체제 하에서 살고 있음을 생각해야 한다. 정치범은 여전히 포위돼 있고, 굴라크(Gulag)도 존재하고 있다.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굶주리고 있으며, 무수한 사람들이 전체주의 국가에 반대한다는 이유만으로 가족 및 친구들과 떨어져 지내야 한다”며 “냉전 시기는 지났지만 인류 자유를 대변하는 투쟁은 오늘날에도 이어지고 있다”고 밝혔다.
2014년 11월, 미국 워싱턴 싱크탱크 전통 기금회에서 <민주와 자유에 대한 추구: 베를린 장벽 붕괴의 경험> 포럼을 개최했다. 펜실베니아 대학의 역사학 교수 코르스(Alan Charles Kors)는 인류 역사상 공산주의처럼 무구한 희생자와 고아를 양산한 일은 없었다고 지적했다. 또 공산주의는 인권을 유린하는 터무니없는 명칭이며 베를린 장벽 붕괴가 공산주의의 자멸을 명확히 보여준다고 코르스 교수는 말했다.
윤리와 공공정책 센터 연구원 조지 웨이겔(George Weigel)은 베를린 장벽 붕괴는 공산주의가 자유를 가진 시민들이 전제의 압제에 대항해 문명사회를 재건하려는 의지를 만천하에 증명한 사건이라고 밝혔다. 웨이겔 연구원은 중국을 꼬집어서 공산주의는 영원하지 못할 것이며, 중국 공산당 지도층도 고르파초프와 같은 결정을 해야 할지 모른다고 지적했다. 중국 공산당이 계속해서 시민들의 문화, 신앙, 사상의 자유를 억압한다면 문제가 터져 나올 것이라고 전망했다.
베를린 장벽이 건설에서 붕괴에 이르기까지 희망의 불길은 결코 꺼진 적 없었다. 희망은 어둠속에서 타올랐다. 꿈은 용기를 업고 날아올라 붉은 추악함을 끌어 내렸다. 긴 밤과 여명은 교차되며 나타난다. 역사는 모든 자유와 항쟁으로 희생된 생명을 기록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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